신형철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9. 8. 3.

앞선 글에서, 블로그에 오래도록 글을 적지 못한 이유로 감상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번 글에서 감상을 확신하지 못했던 구체적인 계기에 관해 쓰고자 한다. 얼마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필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전에도 다양한 글을 필사했지만 이처럼 구조가 튼튼하고 문장이 정갈한 글은 베껴 적이 없었다.

 

대게 좋은 글 필사하면 마음이 편안한데, 이번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동안 내가  글들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책머리에 쓰인 〈두 번째 산문집을 엮으며〉라는 글에서 작가는 글짓기 준칙  가지를 집짓기에 비유해 소개한다.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 있을 만하고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한다. 편의 글에 그런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나는 믿는다.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없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단락에 들어가야 내용을 배분한다. 가급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린다.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반영해야 한다). 이제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단락도 더하거나 빼면 건축물은 무너진다(무너져야 한다).

 

작가는 준칙을공정이라고도 소개했으니 글을 쓰고자 한다면 번째 준칙인인식을 생산하는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인식’이 아닌 취향입장 기초해 글을 써왔던 것은 아닌가 반성한다. 블로그에 적은 글들이취향 기초했다면, 회사에서 썼던 글들은입장 기초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적는자유로움 글쓰기의 가장 미덕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내가 주장을 지지하자면, 인식을 생산해내는 고통 외면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만 같아 부끄럽다.

 

작가는 같은 글에서 (준칙들) 떠받치고 아우르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라고 덧붙인다. 원칙은 좋은 글을 얻고자 한다면 글쓴이에게 가장 중요한생명 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생명 시간이다. 내가 인식을 생산해내는 것이 고통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시간을 갈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10만큼 투자한다고 하여 인식을 10만큼 얻을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10만큼 투자하더라도 아무런 인식도 생산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필사했고 그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의 말대로 좋은 글쓰기는 인식을 생산하는 일에서 출발해야만 하고, 인식을 생산하기 위해 나의 시간을 내어 주어야 한다. 나의 시간을 내주는 일은 생명을 내주는 것과 같아서 고통스럽다. 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통받기로 했다. 고통으로 인해 블로그에 쓰는 글이 이전보다 확실히 줄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다. 그런만큼 글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