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건 소설 수초 수조

2019. 9. 27.

모든 것은 자리가 있다고 믿는다. 최근 이사를 하며 다시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이러한 나의 믿음은 체념 가깝다. 내가 가질 없는 것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체념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입시며, 입대며, 연애며, 취업이며,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나는 욕심을 내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은 부족한 위치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평온함을 즐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욕심을 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길이 없다. ‘모든 것은 자리가 있다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가 가진 가장 최후의 답변이다.

 

최영건 소설집 《수초 수조》 표지

최영건의 소설집 《수초 수조》에 수록된 단편 〈감과 비〉는자리 관한 이야기다. 소설 노인은 최근 연인 라라와 함께 번화가에 있는 카페 2층에 살게 되었다. 1 카페는 라라가 운영한다. 노인은 젊은이들로 가득한 카페의 세련된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낀다. 노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라라 역시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라라가 상처받을까 속내를 드러내진 않는다. 그저 라라를 지켜보고 배려할 뿐이다. 노인이 라라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비슷한 사람들끼리 나눠 가질 있는 희미한 온기와 동질감 가깝다. 노인은 자신의 고독감을 공유할 비슷한 연령대의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노인은 어느날 카페에 놓인 시들시들한 난초 화분을 발견한다. 그리고 초라한 화분이 근사한 조명과 활기찬 대화로 가득한 카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카페 매니저와 어린 직원 역시 화분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눈치다. 하지만 화분을 카페에 라라만은 화분이 카페와 어울린다고 말한다. 노인은 라라에게당신이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은 것처럼, ‘난초 화분이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화분의 난은 혼자 죽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소리 없이.” 노인은 그렇게 생각한 , 모든 생각을 죄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는 건물 밖으로 자리를 옮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라라는 종종 카페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과 일본어로 대화하곤 했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문제는 라라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였다. 노인이 보기에 손님은 간혹 대화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어색한 미소로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라라가 일본인 관광객을 붙잡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한국인 손님이 라라를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노인이 그렇게 느꼈듯, 한국인 손님은 일본인 관광객이 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한국 이미지까지 좋아질 것이라며 라라를 나무랐다. 상황을 지켜보던 노인은, 이번에도 자리를 옮길 뿐이다.

 

노인은 라라를 저지했던 손님이, 라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카페 매니저의 친구라는 것을 탄식한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고, 잃어가는 와중이었다. 거대한 체념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라라 잃지 않기 위해, 처음으로 그에게 권유한다. 카페에 있는 난초 화분을 2층으로 옮겨다 놓을 것을. 그곳이 난초 화분이 있을 자리이자, 라라 있을 자리인 것이다. 그때 정원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라라는 그것이 모과일 것이라며, 그런 것쯤은 소리만 들어도 있다고 노인에게 말한다. 노인은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이 모과가 아닌 감인 것을 알지만, 대꾸하지 않고 체념한다.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누구에게나 그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어울리는 연령대가 있다. 그것은 성품과 연령 사이의 조화의 문제다.”

 

나는 줄곧 체념하며 살아온 나의 삶의 태도로 인해, 내가 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최근에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태도를 바꿀 없다.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지점 결국 나의 자리라며 또 한 번 체념할 뿐이니까. 소설을 읽고 , 어쩌면 지금의 연령대는 내가 행복할 있는 연령대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믿는 대로, 정말 모든 것에 자리가 있다면,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은 제 자리를 찾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게 맞는 연령대(자리)를 찾기 위해 시간을 앞당길 수는 없으니, 나는 그저 노인처럼 자리를 지키고 체념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