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5.
올해 세운 첫 목표는 신작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막을 내리기 전 소설을 읽고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었다. 새해 첫 달이 지나기 전 첫 목표를 달성한 기쁜 마음에 감상을 남긴다.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애니메이션인 [초속 5센티미터]와 [언어의 정원]를 기분 좋게 봤다. 그의 신작 [너의 이름은] 예고편에서 본 아름다운 영상을 그가 어떻게 소설로 표현했는지 그리고 전작에서 아쉽다고 느낀 느슨한 스토리를 이번에 얼마나 짜임새 있게 구성했는지, 즉, 작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한 마음에 책장을 펼쳤다.
너의 이름은。스틸 컷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은]은 시골 소녀 미츠하와 도시 소년 타키의 몸이 뒤바뀌며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룬다. 미츠하를 만나려던 타키는 혜성으로 인해 미츠하가 살던 마을이 3년 전 사라졌다는 것과 미츠하와 몸이 바뀌는 시간대가 뒤엉켰음을 알게 된다. 운석이 떨어지는 3년 전 그날 미츠하의 몸으로 들어가게 된 타키는 시간을 뛰넘어 미츠하에게 소식을 전하고, 미츠하와 마을 사람은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마치 꿈을 꾼 듯 서로의 이름마저 잃고 지내던 둘은 도쿄에서 운명처럼 재회한다.
시골에 살며 도쿄를 동경하는 여자 주인공인 미츠하에 공감하며 이야기에 빠졌다. 나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대학 입시를 치렀는데, 당시 하나같이 '인서울'을 목표로 공부했다. 지금이야 어느 지역이든 공무원이 되어서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면 그게 최고로 치지만, 그땐 그랬다. 학교와 학원이 서울 소재 대학에 몇 명의 학생을 입학"시켰"는가를 성공적인 교육의 척도로 삼을 정도다.
왜 '인 서울'인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서울 같은 큰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와 존재감을 인정받고자 하는 막연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인 서울'에 실패했지만, 꼭 서울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서 재수를 포기하고 지방의 그저그런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공부를 했다. 서울을 동경한 건 지방과 달리 내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 수 있는 다양성이 존중되었기 때문. 미츠하도 도쿄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길 원했다.
너의 이름은。스틸 컷
'조금만 더'라는 희미한 희망
애니메이션의 인트로로 쓰인 소설의 끝으로 가 보자. 도쿄에서 사회 초년생을 보내고 있는 남자 주인공 타키는 "인생에 발버둥 치고 있다." 자신이 예전에 결심했던 것이 "어디에나 있을 법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몸을 던지는 그는 "조금만 더"라는 기이하고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서울에서 사회 초년생을 보낸 나 역시 일단 서울로 왔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할 틈 없이 인생에 발버둥 치고 있다. 그리곤 어디에나 있을 법하게 살아가는 평범하고 안정된 인생을 꿈꾼다. 명절이면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고향 친구와 친척을 만나 안부를 묻는데 해가 지날수록 서로 점점 멀어져 감을 실감한다. 서로의 환경에 따라 가치관도, 삶의 태도도 점점 확고히 멀어져 간다.
사람들은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는 걸까, 무엇에 '조금만 더'라는 희망을 품고 사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벅차 믿는 게 없는 걸까, 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삶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허무하고 별 볼일 없이 지루한 것 같이 느껴져서, 매 순간 여유와 유머를 갖고 작은 것에 웃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신카이 마코토는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를 잃고 말았지만, 발버둥 치자고 결심한 사람. 그리고 그런 마음은 영화의 화려함과는 다른 절실함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느꼈기에 나는 이 책을 썼다"고 밝혔고 각종 매체에서 동일본 대지진, 세월호 참사 등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재난을 모티브로 삼았음을 밝히기도 했다.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쓴 가와무라 겐키는 [너의 이름은] 해설에서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잊어간다. 하지만 그것을 거역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삶을 살아 나간다"라고 했다.
아마도 소설은 개개인이 소중한 것을 잊지 않고 고군분투하며 살다 보면 어느덧 더 나은 세상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는, 희미한 희망을 말하는 듯하다.
너의 이름은。표지
아름다운 한편 불편한 영상
소설을 읽고 영상을 본 건 잘한 일이다. [립반윙클의 신부]와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핑거스미스]는 영화를 먼저 봤는데, 소설을 먼저 읽었다면 더 풍부한 감상이 되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글을 읽으며 마음껏 펼친 상상의 나래를 영상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았으리라. [너의 이름은] 애니메이션 영상은 글을 읽으며 펼친 내 상상력을 뛰어넘을 만큼 아름다웠다.
영상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건 아니다. 타키가 미츠하의 몸을 1인칭 시점으로 만지는 장면이라던가 ─미츠하의 시선으로 타키의 발기된 성기나 그것을 만지는 장면을 보여주진 않는다─ 짧은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탈 때 낮은 시점으로 속옷을 비추는 장면은 꽤 불편해서 몰입도를 깼다. 그런 점에서는 소설이 훨씬 좋다.
대중적 흥행에 초점을 맞춘 애니메이션이라서 그런 장면을 넣었다면 작가에게 큰 실망이다. 그저 작가가 그것이 잘못된 건지 몰랐길 바라며, 이번 기회에 고치길 바랄 뿐이다. "자전거를 타는 미츠하의 속옷이 비쳤다"고 소설에서 묘사하는, 되돌릴 수 없는 재난은 피했으니 만회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전작에 비해 이야기의 구성이 한층 탄탄해졌듯, 앞으로 더 성숙된 작품을 만들기를 신카이 마코토에게 기대한다.
─
책 속 밑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노을은 이미 사라졌다. 일등성이 몇 개 떠 있고 제트기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날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혜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녀석이 살아 있지 않다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것은 생명 그 자체였다. 미츠하는 현실이었다.
모래성이 다 허물어진 후에는 사라지지 않는 덩어리가 하나 남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아쉬움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순간에 나는 깨닫는다. 앞으로 내게 남은 것은 이 감정뿐이라는 것을. 누군가 억지로 맡긴 짐처럼 나는 아쉬움만 떠안는다는 것을.
나는 문득 잘못된 계절에 발을 헛디딘 듯한 불안을 느꼈다.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소중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쳐다보게 된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괜찮으니까.
나는 생각한다.
아주 조금만 더. 정말 조금만 더.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계속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