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8.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이 있다면, 영화를 먼저 보아야 할까, 소설을 먼저 읽어야 할까? 난 참지 못하고 영화를 먼저 본다. 소설은 책은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영화는 극장 시간을 맞추어야 하고 스크린에서 내려지면 애써 찾아봐야 하기 때문. [립반윙클의 신부]도, [핑거 스미스]도 그랬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역시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었다. 영화 예고편을 보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주인공에게 악마가 찾아와 하루씩 삶을 연장해주는 것을 대가로 세상에서 무언가를 없애버린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생각을 고쳤다. 동화 같기보다 너무나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라고.
아키라 나가이 감독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고양이를 맡기러 가는 장면 / 출처: www.howardforfilm.com
첫 번째 날에 전화기, 두 번째 날에는 영화, 세 번째 날에는 시계, 네 번째 날에는 고양이… 자신의 삶을 하루씩 연장하는 것을 대가로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일상 속 무언가에는 연인과 친구와 가족과 함께했던 행복한 추억이 깃들어 있다. 주인공은 물건을 없앨수록 그것과 함께 사라지는 추억들이 선명히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이야기가 세련되었다고 느낀 건 죽음을 앞둔 주인공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지는 주인공의 마음이 일주일 동안 어떻게 바뀌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전화기를 없애며, 영화를 없애며, 시계를 없애며, 고양이를 없애며,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없애기로 하며, 자신이 행복하게 살아왔을 생생히 느끼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와무라 겐키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표지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인공은 무언가를 잃으며 하루를 얻기를 결국 포기한다. 물론 하루를 포기하며 얻은 것이 있다.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 아버지에게 쓴 편지와 양배추를 자전거에 싣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마지막 장면이 아련하다.
애초에 악마는 없었다. 악마는 주인공의 내면에 있었다. 세상에서 무언가 사라졌다고 느낀 건 뇌종양으로 인한 일시적인 장애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사라졌던 건 다시 회복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동화로 시작한 이야기의 끝은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영화와 소설의 큰 흐름은 같지만, 어머니의 편지를 전달받는 장면이나 악마의 옷차림, 양배추가 말을 하는 장면 등 몇몇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저마다 영화로서, 소설로서의 재미를 살린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 것을 발견하며, 왜 이 부분은 뺐을까? 왜 이 부분은 다르게 표현했지? 하며 생각해 보는 것도 또다른 재미였다.
영화관을 빠져나와 신촌을 걸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집 밖을 나섰다.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돌아보게 된다. 코끝에 닿는 초겨울의 찬 공기와 달리, 내 손길과 마음이 닿은 작은 것 하나에도 영혼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는 감각에 마음이 훈훈했다.
가와무라 겐키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삽화
문득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라는 박경리 소설가의 유고 시집 제목이 떠오른다. 스무 살 입대를 막 앞두었을 때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시집. 고인은 다 버린다지만, 추억만은 잘 간직한 채로 떠났겠지? 추억을 하나하나 새어볼 생각에, 벌써 올겨울을 따뜻하게 다 보낸 것만 같다.
책 속 밑줄 (모음)
누군가가 얻고 있는 그 순간에 누군가는 잃는다.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그런 세상의 룰을 들려주었다.
분명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무한한 미래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미래가 유한하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 안에서는 미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양상추가 양배추가 어머니가 사라진다면. 그런 상상을 하지 못했던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 그러나 지금은 안다. 세상에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있어도 사라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을.
"당신은 마지막 순간에 소중한 사람이나 둘도 없이 귀한 것들을 깨달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알았어요. 자기가 사는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고 새삼 다시 바라보는 세상은 설령 따분한 일상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것만으로도 내가 찾아온 의미는 있었을지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