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9.
어젯밤 세라 워터스의 장편소설 [핑거스미스]를 (마침내) 다 읽었습니다.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처음 택배 상자를 열고 그 두꺼운 볼륨에 ‘이걸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을 좇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겼습니다.
침대맡에 두고 잠들기 전에 거의 매일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잠들기 싫었고, ‘조금 더 일찍 누워 읽을걸’, 하며 아쉬워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고, 가끔은 수와 모드에 대한 꿈도 꿨던 것 같습니다. 보통 새벽 모기를 잡느라 잠에서 깨면 짜증이 났는데, 잠들기 전 또다시 책을 읽을 마음에 왠지 모를 기쁨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친구와 술 약속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도 읽고, 다음날 숙취 속에 거리를 걷다 너무 힘들어서 벤치에 잠시 누웠을 때 베개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크기가 베개로 사용하기 딱 맞던데요). 책갈피가 책등을 타고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두꺼운 책을 독파해 나가는 쾌감도 느꼈습니다. 지난 한 달간 제가 실제 세상과 수와 모드의 세상을 분주하게 오가며 살았더니, 두세 개의 삶을 산 것 같아 마음이 풍요로워진 느낌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본 뒤 [핑거스미스]를 읽었습니다. 책을 기준으로 1부부터 2.5부까지는 내용이 같아서 대화마다 [아가씨] 영화의 배우들이 떠올랐는데, 2.5부 3부 마지막까지 전개가 완전히 달라지며 워터 세라스가 구축한 세계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보지 않고 책을 읽었더라면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물론, 김민희와 김태리가 떠올랐던 게 싫지는 않았지만요).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아가씨]보다 [핑거스미스]가 더 흡입력 있었습니다. 아마 영화에 없던 부분이어서 더욱 그랬을지는 몰라도, 중후반부에 몰아치는 이야기 전개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드라마는 원작의 내용과 구성에 충실하다고 하니 조만간 시간을 내서 보고 싶습니다.
마치 아코디언 같은 구성이 흥미로웠는데, 이야기를 3장으로 나누어 두 화자를 겹쳐놓고, 서로 중복된 이야기와 개별 이야기를 오가며, 새롭게 전개되는 서사와 반전에 끌려 지루할 틈 없이 꾸준히 읽었습니다. 명료하고 짧은 문체도 막힘없이 술술 읽기에 좋았습니다. 또한, 대화를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와 화자의 독백을 오가며, 마치 대나무가 한 마디씩 그리며 성장하듯, 쉬어가며 읽기 좋은 호흡이었습니다. 수와 모드가 떠올린 생각들과 느낀 감정들은 앞으로 제 삶을 살며 어떤 일을 겪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골목길에서, 컴컴한 방 침대 위에 그리고 베개에 숨죽이고 있다가 나타나 힘이 되어줄 것만 같습니다. 그게 소설을 읽는 기쁨과 위안이 아닐까요?
그 여자는 나를 몰랐다. 나도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 여자를 몰랐다. 그 여자는 데인티 워런과 존 브룸이 우리 집 부엌에서 폴카를 추는 동안 내가 이곳에 서서 자신을 망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을 몰랐다.
모드는 어린애에 가까웠다. 여전히 약간 떨고 있었고,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이 깃털처럼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떨림이 멈추자, 속눈썹이 다시 한 번 내 목을 스쳤고 그리고 잠잠해졌다. 모드는 무거워지고 따뜻해졌다. '착하기도 해라.' 모드가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내가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다시 캄캄한 혼란 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리고 꿈이 갑자기 내게서 미끄러져 나가고 나는 수를, 그리고 나 자신을 자각한다. 내 과거, 현재,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자각한다. 수는 내게 낯선 사람이지만 내 모든 시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수가 내 옷을 벗겨 주러 오면 나는 차분하게 수의 손길을 견뎌 내겠다고 결심한다. 밀랍 마네킹이 재단사의 재빠르고 무관심한 손길을 견디어 내듯이 말이다. 하지만 밀랍 팔다리라도 결국은 자신을 올리고 내리는 손의 열기에 져 녹아내릴 게 분명하다. 결국은, 내가 수에게 지는 밤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