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31.
10년 전에 뉴욕을 한 달 가까이 여행했다. 마땅한 계획 없이 떠났던 터라 어느 정도 여행한 뒤로 몹시 무료했고,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여기저기 도시를 배회했다. 그러던 한날, 지하철역에서 에드워드 호퍼 전시가 열리는 휘트니 미술관의 전시 포스터를 보았다. 당시 즐겨 읽던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소개된 작가라 더욱 눈에 띄었다. 아마도 그 책은 <여행의 기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 휘트니 미술관으로 향했다. 당시 휘트니 미술관의 건축에 대해 모른 채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이끌려 갔던 터라, 외부 건축을 충분히 감상하지 못했다. 여행에 다녀온 후 마르셸 브로이어가 설계한 건축물임을 알고 충분히 건축을 즐기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하지만 실내 건축에서 느낀 감상은 뚜렷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곧장 미술 작품이 수평으로 펼쳐지는 전시장의 구성이 여느 미술관에서의 경험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휘트니 미술관은 맨해튼의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휘트니 미술관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으로 렘 콜하스의 파격적인 증축 설계안이 있었는데, 911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증축 계획 자체가 무산된다. 아마도 기존의 건물을 덮치는 듯한 디자인이 지나치게 공격적인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증축이 아닌 신축으로 계획이 변경되었고, 하이라인의 남쪽 끝 지점인 미트패킹 지역에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건축물로, 2015년 휘트니 뮤지엄이 완전히 새롭게 문을 연다. 건축 뿐만 아니라 뮤지엄 브랜드도 새롭게 디자인되었는데, 건축물과 함께 뮤지엄 브랜드 디자인이 공개될 당시 건축과 브랜드 디자인이 훌륭하게 통합된 모습에 크게 매료되었고, 당장이라도 뉴욕으로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뉴욕 여행에 대한 계획을 가졌다. 그 뒤 만 4년이 지나고 떠난 뉴욕 여행의 첫 목적지가 휘트니 뮤지엄인 이유다.
렌조 피아노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이다. 이탈리아는 광장의 나라. 기억을 더듬어 휘트니 뮤지엄이 오픈할 당시 렌조 피아노의 인터뷰를 보면 광장(piazza) 개념을 강조했었다. (그가 설계한 파리의 퐁피두 센터도 엄청난 광장을 끼고 있고, 서울의 KT 광화문 신사옥 역시 협소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광장의 개념을 적극 활용했다.) 휘트니 뮤지엄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좁아지도록 디자인된 입면 캐노피 디자인. 각 층별로 마련된 외부 테라스 공간과 외부 테라스 공간에서 다른 층으로 오갈 수 있는 외부 계단. 1층에 마련된 레스토랑과 최고층의 뮤지엄 카페테리아. 광장처럼 대중에게 아주 개방적이고 열려 있는 구조의 친근한 건축물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걸으며 이용하는 하이라인의 끝자락과 맞닿아 있어서, 이러한 건축적 매력이 배가 된다. 마치 휘트니 뮤지엄을 위해 하이라인이 계획된 것처럼(실제론 반대겠지만), 둘의 시너지가 대단했다.
시간을 두고 휘트니 뮤지엄을 둘러보니, 마르셸 브로이어가 설계했던 과거 휘트니 미술관 건축물에 대한 오마주도 인상적이었다. 과거 휘트니 미술관은 계단을 뒤집어 놓은 듯한 독특한 외관과 무게감 있는 입면, 특히 그 입면에 작게 낸 비대칭 형태의 작은 창문이 특징이었다. 허드슨강에서 보는 현재 휘트니 뮤지엄의 매스감은 과거 휘트니 미술관의 비대칭 창문과, 시티 방향에서 보는 현재 휘트니 뮤지엄의 입면은 과거 휘트니 미술관의 계단을 뒤집어 놓은 듯한 독특한 외관과 형태적 유사성을 가졌다. 외관 계획만이 아니라 평면 계획에서도 과거와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었다. 유난히 컸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정면에서 미술 작품들이 쏟아질 듯 마주 보이던 과거 휘트니 미술관의 평면적 특성이, 현재의 휘트니 뮤지엄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미술 작품이 곧장 펼쳐진다.
무겁고 과묵했던 과거 건축과 정반대로 가볍고 개방적인 건축인데도,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새삼스럽게 렌조 피아노가 좋아졌다. 역사적, 사회문화적, 건축적 맥락들이 유기적으로 엮여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 도시, 뉴욕 또한 새삼스럽게 매력적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