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12.
대학에서 건축 역사를 공부하며 한국 건축은 한옥 이후에 없거나 국제적 맥락 안에서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주하는 원룸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다. 소위 '집 장사'가 지었다는 말로 헐뜯으며 건축문화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죽하면 국내 건축 학자들이 너도나도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 라고 비평했을까.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The FAR Game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 게임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들, 신경섭
대학 4학년, 2014년도에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 전시 한반도 오감도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국제 건축계에서 한국 건축이 인정을 받았다는 점 자체로 카타르시스였다. 냉전 시대의 종말과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각기 다른 양상으로 성장해 온 남한과 북한의 건축을 이념의 프레임으로 짚은 전시로, 한국 건축의 정체성을 살피는 첫 단추였다고 생각한다.
또 기억에 남는 전시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아키토피아의 실험. 세운상가, 파주&헤이리, 판교로 이어지는 관 주도의 세 가지 도시 개발 정책을 살피며 전후 근대 건축부터 현대 건축까지, 시대별 욕망이 투영된 건축문화를 살폈다. 나는 이 전시가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국가가 주도하는 도시 정책이라는 게 마치 오발탄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채 여기저기 난발되고 있다고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느낌이었다.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The FAR Game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 36개 건축물의 모형
작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전시였던 용적률 게임 The FAR Game 이 귀국전으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용적률'을 주제로 한국 건축을 살핀다. 학생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용적률, 건폐율과 같은 건축 법규는 건축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따분하고 어려운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졸업작품을 할 때 이런 법규를 깡그리 무시한 상황을 은근히 배경으로 삼았다.
하지만 현실의 건축은 용적률이 지배한다. 내가 익숙히 보고 자란, 소위 말하는 '집 장사'가 지은 원룸촌의 풍경, 즉 다세대·다가구 주택과 소규모 근린생활시설 건물들은 땅값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용적률과 저렴한 마감재로 지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아파트 공화국'으로 알고 있던 대한민국은 실상 아파트보다 다가구·다세대 주택에 사는 인구가 더 많다고 한다. 이 논리로 전시는 한국 건축의 전면에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다가구·다세대 건축을 내세운다.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 게임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들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 게임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들, 백승우
한국의 건축가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건축 법규 내에서 의뢰인의 욕망과 자신, 건축가의 욕망을 뒤섞어 골목 풍경을 만들어 왔다. 그 골목은 아파트와 빌딩 숲 너머에서 주거 공간과 맛집과 예쁜 카페를 수용하며 소위 말하는 힙플레이스가 되었고, 역으로 힙플레이스를 따라 다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자본을 끌어들여 골목 풍경을 한번 변화시켰다. 연남동!
전시는 용적률로 시작해 용적률로 끝난다. 방대하고 알찬 자료가 용적률이라는 주제로 엮여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전시 경험은 한국 건축에서 용적률이 얼마나 중요한 척도로 작용해왔는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전시장 한가운데 진열된 36개 건물 모형은 용적률과 의뢰인의 욕망이 건축가의 창의성을 거쳐 다양한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상의 건축에 흥미를 갖게 한다.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 전형적인 다가구·다세대 주택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 36 참여건축가 작품전
전시를 기획한 김성홍 예술감독은 서문에서 "한국의 건축가들은 최대한의 바닥면적에 대한 욕구와 이를 제한하는 법과 제도 사이의 긴장을 거부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혁신을 찾아내야 한다."라며, "용적률 게임은 현대 한국인의 자화상"이라 짚었다. 먼 길을 돌아와 이제야 한국 건축이 세워질 땅을 제대로 찾은 느낌이다. 이 땅에 올려질 앞으로의 건물과 그곳에서 살아가게 될 사람들의 풍경이 벌써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