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2016. 11. 3.

인문학이 현대인이 안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이끌 수 있을까? [사피엔스의 미래]를 읽으며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인문학이 치유할 수 있다는 알랭 드 보통의 믿음을 보았다. 그의 믿음은 내가 매일 밤 탐독하는 문학에 대해서, 그 문학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학을 읽으며 마음에 근육이 생긴 것 같다. 육체 운동을 꾸준히 하면 몸에 근육이 붙는 것처럼 마음에도 근육이 생겼다. 최근 고민거리가 생겨서 ‘마음 쓸 일’이 생겼는데, 그때마다 문학이 내게 위안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주었다. 그 느낌을 묘사하자면, 어둡고 서늘한 ‘불안의 골목’을 지나 밝게 빛나는 마음의 문을 열었더니, 그동안 읽었던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마라타 가야키 소설 [편의점 인간] 표지 / 커버디자인 김형균


[편의점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물음을 도회적 감각으로 세련되게 끄집어낸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후루쿠라와 그녀의 인생에 느닷없이 끼어든 남성, 시라하는 소위 말하는 사회의 ‘아웃사이더’이다. 이들은 30대 중반에 변변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무직인 상태로 타인에게 빌붙어 산다.


그렇다고 이 둘이 똑같은 종류의 아웃사이더는 아니다. 후루쿠라는 18년째 한 편의점에서 꾸준하게 일을 해왔지만, 그녀와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게 된 시라하는 불평만 늘어놓다가 얼마 안 되어 일을 그만두고 숨어버린다. 후루쿠라는 마치 정해진 매뉴얼을 따라 연기하듯 자신의 아웃사이더 인생을 현실에 끼워 맞춰 보려고 애를 쓰는 반면, 시라하는 현실에서 도피해 완전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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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드러나는 ‘보통 인간’은 폭력적이다. 보통 인간은 ‘아웃사이더’를 깎아내리며 결속을 다진다. 그럼으로써 얻는 것은 남들과 같다는 안도감. 즉, 불안하지 않음이다. 보통 인간으로 착실하게 살아온 후루쿠라의 친구들은 아웃사이더인 후루쿠라를 불편할 정도로 걱정하는 한편, 자신들이 이루고 있는 보통의 인생에 안도하며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일정한 생애주기를 달성해 나가는 보통 인간은 점차 행복에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저 불안함을 지워가며 안정감 속에 정체된 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시라하가 불평하는 대로 고도로 발달한 듯한 현대 사회의 본질은 조몬(석기) 시대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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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 주인공인 후루쿠라가 흥미로운 건 불안함을 외부 조건으로 지우는 것이 아닌, 자신 내부에서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개인’이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 사회의 규칙과 감수성에 동화하지 못해 문제아로 취급받던 그녀는, 타인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가는 수동적 인간이 되었다. 그녀가 대학생이 되어 시작한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이 잘 맞았던 것도 모든 행동지침이 매뉴얼로 정해진 그곳에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려 18년이 지나 30대 중반이 넘어서까지 미혼인 데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기에 사회의 시선이 달갑지 않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가 자신을 ‘사회 이물질’ 취급하는 것에 불안해진 후루쿠라는 편의점을 떠나 남성과 계약 동거하며 새로운 일을 찾는다. 하지만 자신이 사회의 일원이자 개인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이라곤 오직 편의점 아르바이트뿐인 ‘편의점 인간’임을 깨달으며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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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보통의 인간’이 되길 강요하지만,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무감각하다. ‘개인’이 됨으로써 얻는 인간의 자유는 불안을 조장하는 ‘보통 인간’의 불편한 시선에 꽁꽁 묶여버린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세대, 계층의 갈등은 ‘보통’이라는 무감각 속에서 자행되는 자유에 대한 다수의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난다. 성숙한 사회란 구성원이 개인이 되는 것은 진심으로 응원하고 다양성을 지지하는 사회가 아닐까? ‘개인이 이루는 사회’는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다. "반드시 후회할 거야, 반드시!"라는 시라하의 악담에도 불구하고, 편의점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편의점 인간’임을 깨닫는,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깨우친 한 개인, 후루쿠라처럼.


책 속 밑줄 (모음)


왜 편의점이 아니면 안 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점원'이 될 수 있어도,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전혀 모르는 채였다.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때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편의점은 강제로 정상화되는 곳이니까, 당신도 곧 복원되어버릴 거예요. 이 말을 나는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고, 빈둥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사라하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편의점에 합리적이냐 아니냐로 판단하던 나는 이제 기준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 행동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아까 나온 편의점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손과 발도 편의점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유리창 속의 내가 비로소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