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 충격적이고 기괴하고 애처롭다

2018. 5. 15.

귓속을 울리는 이명, 지끈거리는 두통,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누군가 좇아오는 듯한 피해망상… 가끔 그런 증상에 시달릴 때면, 나는 식물이 되고 싶다. 주어진 땅에 홀연히 서서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름드리나무처럼, 아무 생각과 의지를 갖지 않고, 물과 햇살만 먹고 받으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늙는, 맑은 상태를 꿈꾼다.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속 인물, 영혜는 정말 하루씩 식물에 가까워지는 삶을 산다. 처음부터 식물이 되려 한 것은 아니다. 시작은 채식주의였다. 육식에 관한 악몽을 꾼 뒤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끔찍한 악몽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어릴 적 트라우마를 끄집어낸다. 동시에 그녀의 채식 기준도 엄격해진다.


조용하고 순종적이기만 하던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며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 부인의 변화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위협한다고 느끼는 남편. 채식으로 점점 야위는 딸이 가정을 잘 지켜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모. 먹이를 앞에 둔 들개의 송곳니처럼, 남편과 부모는 가부장적 면모를 드러내며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려 달려든다. 아버지는 영혜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고기를 쑤셔 넣는다.


하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육식을 거부한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영혜는 햇살에 가슴을 드러낸 채 새의 상처를 핥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 더이상 영혜를 이해할 수 없는 남편과 부모는 결국 그녀를 버린다. 내게 그 행동은 자신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트라우마를 벗어나 자연 상태로 회귀하려 했던 영혜의 노력이 아닐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내 이해일 뿐, 영혜는 명백히 미쳤다.



《채식주의자》는 표제작 단편인 〈채식주의자〉 뒤로,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으로 쓰였다. 〈채식주의자〉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몽고반점〉은 또다시 폭주한다. 〈채식주의자〉가 충격적이라면, 후작은 기괴하고 역겹다.


영상 예술가인 영혜의 형부는, 영혜의 엉덩이에 작은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알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는 영혜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넣고 몸을 뒤섞는 영상을 촬영하고 예술적 성취를 맛본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의 이야기는 결국 부인에게 발각되어 파멸한다.


마지막 단편 〈나무 불꽃〉은 폭주하는 소설을 진정시키듯, 영혜의 언니의 차분한 시점으로 흐른다. 끓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애써 담담하게 읊조리는 듯한 서정적인 문체. 무너진 가정 속에서 아들과 가게를 돌보는 피곤한 가장의 삶. 자신이 정신병원에 가둔 동생, 영혜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처절한 그녀의 도덕심이 애처롭다.


그녀는 먹기를 거부하고 식물이 되려는 영혜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설득하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식물이 되려는 영혜를 힘없이 이해하게 된다. “왜 죽으면 안 돼?” 라고 되묻는 미친 동생과, 미친 남편이 남기고 간 아들을 돌봐야만 했기에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처참한 생각에 이르자, 영혜에게 더이상 삶을 강요할 수 없게 된다.



책장을 덮고 이토록 영혜의 언니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왜일까? 끝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동물. 어떠한 욕망도 갖지 않는 식물. 둘 중 무엇도 될 수도 없는 인간의 딜레마, 그게 아니면 세상을 둘로만 나누어 이해하는 이원론적 강박에 사로잡힌 인간의 허무함을 그림자 없이 드러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서두에 밝힌 대로 나는 가끔 식물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반대로 동물이 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되려 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