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헛간을 태우다 對 이창동 영화 버닝

2018. 5. 26.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반딧불이》에 수록된 〈헛간을 태우다〉를 읽고, 이 단편을 원작으로 한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원작 소설인 〈헛간을 태우다〉는 뒷전이고,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소설인 《기사단장 죽이기》가 떠올랐다. 종수 아버지의 검,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르는 장면, 어릴 적 우물에 빠진 해미를 종수가 구한 이야기, 벤이 가진 해미의 손목시계 등… 영화의 스토리는 원작을 따랐지만,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나 메시지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시 들쳐, 이 소설을 연상케 한 부분들을 읽어본 후 영화를 해석하려고 하니, 오히려 감상의 실타래가 더욱 뒤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작가를 잘 아는 파인딩 하루키 블로그 운영자에게 물었더니 오히려 《1Q84》가 떠올랐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창동 감독은 국어교육과 출신에 소설가로 활동한 적이 있는 문학인이었다. 그러니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상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서 '하루키 월드'의 색이 짙은 작품이 탄생한 탓이라고 추측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반딧불이》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


영화는 난해하다. 어느 장면 하나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이 없고 상징적인 요소들로 가득 찼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상징들을 관계를 해석하려고 두뇌가 핑핑 도는 한편,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인해 눈과 귀는 호사를 누렸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나도록 감상이 정리되지 않아, 이제 그만 잊고 싶었다. 그러던 때에 약 10여 년 전에 쓰인 어느 블로거의 〈헛간을 태우다〉 독후감을 보고 영화를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 리뷰는 작가의 삶을 꿰뚫는 명쾌한 해설이었다.


〈헛간을 태우다〉를 읽은 독자가 4가지 질문을 품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 네 가지 물음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첫째, 왜 여자가 알제리에서 사귄 그는 헛간을 태우는가? 둘째, 여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셋째, 나는 왜 그의 헛간 태우기에 관심을 가지는가? 넷째 소설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철학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전체 스토리를 가져다 쓴 영화에 던져도 좋을 질문이다. 10년 전 그 블로거의 네 가지 물음을 기초로 소설과 영화를 정리한다.


*소설과 영화의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합니다.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 스틸컷 | 촬영 홍경표


1. 그는 왜 헛간을 태우는가?


소설 속 여자가 알제리에서 사귄 그는 헛간을 태운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가 태울 헛간은 나의 집에 아주 가깝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한 헛간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왜냐면 주인공 나는 남자가 어떤 헛간을 태울지 찾기 위해 매일 동네를 돌아다녔으나 끝내 그가 태웠다는 헛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가 태웠다는 헛간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나는 종수유아인, 여자는 해미전종서, 남자는 벤스티븐 연으로 나온다. 소설과 달리 종수는 해미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동갑내기 친구이고(소설에서 나는 여자보다 12살 정도 많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 살아가는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리고 벤은 헛간이 아닌,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한다. 비닐하우스가 메타포라는 점은 종수와 해미가 우연히 만나는 영화 초반부에서 ‘귤껍질 까기’ 팬터마임과 해미의 북향 원룸에 드는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이 암시한다.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 스틸컷 | 촬영 홍경표


2. 여자는 어디로 사라졌나?


소설에서 여자가 의도를 갖고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자는 나와 3년 동안 친구로 지내며 아버지의 죽음과 유산 상속, 새로 사귄 남자친구 등 그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말하는 인물이다. 남자친구인 그 남자는 여자가 나만큼은 정말 신뢰한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론가 떠났다고 보기에는 어색하고, 어떤 사건으로 납치를 당했거나 살해를 당한 것으로 보이며, 그 사건을 꾸민 사람은 그 남자로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첫 번째 질문을 이어받아, 그가 실제 헛간을 태운 것이 아니라, 그녀를 태웠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종수는 벤이 자신의 집 가까운 곳에서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해미는 사라진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며 신뢰하던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진 것 역시 벤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서 증거로 손목시계와 고양이를 내세운다. 해미가 사라진 뒤 벤의 집 화장실에서 발견한 해미의 손목시계는, 종수가 탄 경품을 해미에게 선물한 것으로, 벤에게 줬을 리 없다. 그리고 벤의 집에서 도망친 고양이를 찾을 때, 해미가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인 ‘보일이’라고 부르자 종수에게 안겨 해미의 고양이임을 암시한다.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 스틸컷 | 촬영 홍경표


3. 나는 왜 헛간 태우기에 관심을 가지나?


마리화나를 피우며 남자가 나에게 헛간을 태운다고 고백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소설가이므로 인간의 행동 양식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남자는 말한다. 나는 마리화나를 피울 때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에서 했던 연극을 떠올리는데, 추위에 떠는 엄마를 위해 새끼 여우가 장갑을 사러 오지만 돈이 부족해서 상인인 자신이 새끼 여우를 내쫓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마리화나를 피우며, 자신만의 도덕 기준이 있다며, 그것은 남을 야단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는 동시 존재라고 말한다. 마리화나 대화를 미루어 보아, 자신만의 도덕 기준을 갖고 남의 헛간을 태우는 무법자인 그 남자를 통해,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반 시민인 소설가는 그가 어떤 헛간을 태울 지 호기심을 갖기 충분하다.


영화에서는 마리화나 대화에서 종수가 아닌 해미가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 낸다. 해미가 어린 시절 동네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그녀를 구해줬다는데, 종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네 어르신에게 물어도 우물은 없었다고 하고, 해미의 가족 역시 해미가 어릴 때 우물에 빠진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반면, 종수의 어머니는 동네에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말해, 해미의 기억이 사실인지 가짜인지 모호하다. 벤이 해미를 태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종수는 ‘진실’을 찾기 위해 벤의 일상을 몰래 뒤좇는다. 벤은 왜 해미를 불태운 것일까?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 스틸컷 | 촬영 홍경표


4. 남자는 왜 여자를 태웠나?


소설에서 여자는 가족과 친구가 없고, 일정한 직업과 돈도 없으며, 남자들의 호의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나 역시 그녀와 만날 때 모든 돈을 자신이 지불한다. 반면, 남자 역시 딱히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현대판 개츠비로 비추어진다. 어쩌면 남자에게 여자는 버려진 헛간처럼 사회의 잉여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도덕 기준에서 ‘태워지길 바라는’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돈이 있는 자남자가 없는 자여자를 자신의 도덕 기준으로 좌지우지하는 뒤틀린 자본주의 사회를 꼬집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인 나는 일 년이 지나도록 꾸준히 헛간을 살피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상을 살아가는데, 그 모습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해미는 먹을 것이 부족한 리틀 헝거Little Hunger를 너머,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를 찾아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벤을 만난다. 해미는 돈과 시간으로부터 줄곧 자유롭고자 ‘그레이트 헝거’가 되길 바라는데, 벤과 같이 기댈 곳이 없으면 그럴 수 없는 빚진 존재다. 벤은 그런 해미가 자유를 위해 ‘태워지길 바라는’ 것으로 느꼈을지 모른다. 소설의 소극적인 나와 달리 종수는 적극적으로 나서 해미의 행방을 찾는다. (여기서부터 소설에 없는 부분이다.) 종수는 몰래 벤의 일상을 뒤좇는데, 벤이 홀로 찾아간 곳이 자신의 동네에 있는 산중의 호수다. 벤이 해미를 불태웠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지 못하지만, 아마 벤이 해미를 불태운 유골 재를 그곳에 뿌린 것이 아닐까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영화는 종수가 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자신의 옷과 함께 불태우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창동 감독은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주지 못한 소시민의 허무하고도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