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3.
언제부턴가 시끄럽다. 특히 술자리에서 시끄럽다. 예전에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술을 마실 때면 쉽게 흥분하고, 말이 많고 시끄러웠던 것 같은데, 최근들어 그 빈도가 확실히 늘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었거나, 술자리가 늘었거나, 혹은 단지 나이가 들어서 말이 많아졌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 뚜렷한 원인을 모르겠다.
몇 주 전에 나의 말 많고 시끄러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일이 있다.
대학 선배 W형이 결혼한다고 해서 공덕 족발집에서 대학 동문 및 W형 직장 후배와 만났고, 그날 역시 난 시끄러웠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W형 후배가, 그날 처음 본 나에게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고 핀잔을 줄 정도로. 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지만, 처음 본 사이에 핀잔을 주다니, 무례한 것 아닌가?
나는 반성하지 않고 귀 아픔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멋대로 진단을 내린 뒤 W형 후배와 자리를 바꿔서 보란 듯 더 시끄럽게 떠들어 대긴 했으나,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니. 꽤 상처를 받아서 그날 밤 잠을 설쳤다.
시끄럽고 말 많은 것, 고쳐야 할까? 설마 나만 재밌는 거야?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이 시끄러워도 계속 나와 꾸준히 교류하며 술을 마시는 친구들이 있는 걸 보면 적당한 선을 잘 지키고 있다고 판단한다. 마치 서퍼가 균형을 잡고 능숙하게 파도를 타듯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니 안 고치는 거로 결론을 내린다.
술자리에서 즐겁게(혼자만 즐거울지라도) 말을 많이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단 웃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흥분할 것. 그리고 대뇌가 만든 신선한 생각을 소뇌로 보내지 않고 바로 입으로 출력할 것. 한마디로 아무말로 대잔치를 열 것.
니시 가나코 [이 얘기 계속해도 될까요?] 표지 │ 을유문화사
니시 가나코의 수필집 [이 얘기 계속해도 될까요?]를 읽었다.
첫 완독한 장편소설 [사라바]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니시 가나코가 쓴 책을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소설보다 작가가 알고 싶다는 마음에 수필집을 샀다. 신간은 아니고, 2007년과 2009년 각각 출판된 수필집 단행본 2권을 재편집하여 2011년에 문고판으로 엮은 것을 작년에 국내에 번역 출판한 책이다. 그러니 [사라바]를 쓰기 한 창 전, 이제 막 30을 앞두었거나 갖 넘긴 젊은 작가의 생각을 알차게 담은 수필집이다.
니기 가나코는 에세이 연재를 의뢰받고 에세이의 정의─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글─를 찾은 후 아무말 대잔치를 열었다. 강렬한 순문학이라 할까, [사라바]에서 느낀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와는 정 반대라서 놀랐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하며 인기를 누린다고 하니, 반전의 매력이 있는 작가였고 그런 태도가 이 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거침없다. '솔직하다'고 평한 독자들이 많은데, 이건 솔직함을 넘어 선 무엇이었다. 가까운 지인과 편집자의 고약한 술주정을 폭로하고, 자신의 실수나 약점과 사생활, 사상도 마치 배를 깐 고양이인 마냥 거침없이 썼다.
저자는 문고판으로 출간될 당시 덧붙인 맺음말에서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웃기자, 안 되면 엉덩이를 까자," 라는 과거 자신의 순진무구한 마음이 엿보인다고 부끄럽게 고백했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가 가진 사람과 세상과 자신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대단하다고 느꼈고 그러한 일화들이 쌓여 좋은 소설의 값진 재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출판사의 블로그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사라바]를 썼던 당시, 저자는 그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소설을 쓸 수 없었다는,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돋보이는 대목.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함에 대한 관심과 주저하지 않는 문장 사이사이에 자신의 감정을 곁들여 넣으며 글에 호흡을 조절하고 의식을 좇아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문맥에 책장도 술술 넘어 갔다. 맺음말에 쓴 저자의 말을 한 구절 조금 길게 인용한다.
자기 혐오에 빠져 나 뭐하고 있지, 이래서는 안 돼, 할 때에 생각 나는 것이 이 두 에세이였습니다. 읽으면 "꺄아!" 하고 크게 소리 지르며 얼굴을 붉힐 게 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읽는다는 의식을 버린다든지, 실제보다 과장되게 자신을 연출하지 않는다든지,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 든지.
그것은 에세이라서만이 아니라 제가 소설가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란 원래 "쓴 문장 전부가 '자신만만한 문장'이라서 부끄럽다, 가까운 사람에게 어쩌고, 멋을 부리고 저쩌고"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임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맺음말에서 특히 작가로서 느낀 자기 혐오와 자기 검열라는 단어에 마음이 쓰였다. 내가 요즘 자기 혐오에 빠져 사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 존재감 없고 필요 없는 것 같은 사람. 영화 싱글라이더에서 재훈의 대사처럼, "우리가 여기 아무도 모르게 혼자 왔던 것처럼 조용히 지나가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살자, 고 마음을 먹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떠오르는 고통의 하루하루들.
니시 가나코와 같이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자기 혐오를 이겨내는 방법은 순수해지는 것. 자신을 검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아무말이나 내뱉고 그런 솔직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러니 서두에 정리했던 '아무말 방법론'을 다시 곱씹어 본다.
일단 웃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흥분할 것. 그리고 대뇌가 만든 신선한 생각을 소뇌로 보내지 않고 바로 입으로 출력할 것. 한마디로 아무말로 대잔치를 열 것.
오늘 밤에는 대학 동기인 J형, H와 술을 먹기로 했다. 바빠서 자주 못 보는 J형을 간만에 만나는 것이니 할 말이 많다. 오늘도 신나게 지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