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1Q84 1·2권 / 사적인 언어는 없다, 삶의 의미는 표현하는 만큼

2017. 7. 15.


요즘 고양이 다나의 울음소리에 하루를 시작한다. 다나는 정확히 새벽 다섯시 삼십 분에 운다. 울음이 서럽기로는 필시 닭 울음 같다. 이른 새벽에 운다는 것도 그렇다.


아침잠은 5분도 꿀같이 달콤한데, 다나 울음소리에 평소보다 두시간이나 일찍 잠을 깨다니. 처음엔 분한 마음이 들어 다나를 나무랐지만, 애초에 고양이는 집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동물이다. 집사가 고양이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체념했다. 그렇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무라카미 1Q84 2권과 고양이


새벽의 고양이


다섯시 삼십 분에 일어나 다나에게 참치캔을 따주고 놀다 보니, 이젠 다나가 울기 전에도 다섯시 삼십 분 즈음에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얼마나 오래갈지. 눈을 뜨고 처음 시야에 들어오는 곳엔 언제나 다나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울음이 아닌 눈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 셈. 그 눈맞춤이 달콤하기로는 아침잠 5분보다 더하다


초보 집사가 관찰한 고양이의 매력을 덧붙여 말하자면, 고양이는 함께하는 시간 만큼 상대를 신뢰하는 정직하고 심플한 생명체다. 상대가 무시하면 무시하는 만큼, 증오하면 증오하는 만큼,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일 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딱 그만큼 갚는 느낌. 처세를 배우기에 이보다 좋은 파트너가 있을까.


이른 시간에 일어나 다나와 한바탕 논 뒤 느긋하게 씻고, 출근 준비를 마쳐도 고작 일곱 시가 조금 넘는다. 원래의 생활 패턴 대로면 일어나기에도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선다. 매일 오가던 출근길도 한두 시간 이른 시간에 나가면 새롭다. 버스와 거리가 한산하다. 그리고 직장인 못지않게 교복차림의 학생이 많다. 직장인들과 달리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수다를 떨며 등교한다.


어릴 적 등굣길을 추억하면, 내 옆엔 항상 함께 걷고 있는 친구가 있다. 서로 몇 시에 여기서 만나자, 라는 약속도 없이 좋아하는 친구가 등교하는 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섰다. 관계의 계산이나 의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던 때. 그 시절에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지금은 잃고 살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관찰한 직장인들에 관해 얘기하자면, 출근 시간에 맞추어 출근할 때 마주치던 직장인에 비해 한결 여유롭다. 걸음이 가볍고 얼굴 근육도 부드럽게 풀어진 듯해 편안한 인상이다. 일을 위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하루를 시작하는 자유로움이 세상 가득하다.


자유란 스스로의 규율과 제약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새삼 느낀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하길 원한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규제해야 한다. 하루 24시간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자유에는 딱 그 시간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것. 책을 읽고 싶다면 책을 읽는 시간을 책임을 져야 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자유란 고양이처럼 정직한 면이 있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만큼 고양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고양이는 사랑받는 만큼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점도.



무라카미 하루키 1Q84 1권


하루키 월드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선다고 해서, 그만큼 일찍 출근하는 건 물론 아니다. 회사 근처 조용한 카페에 들러 책을 읽는다. 독서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자유가되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듯이 하루에 두 장씩, 네 장씩. 편안한 호흡으로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읽었다. 한 권짜리 소설, 아버지와 이토 씨를 한 자리에서 반나절 만에 읽어버린 뒤에 뭔가 헛헛한 마음이 남아서 서운했다. 그래서 아주 긴 이야기에 긴 시간 잠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 아주 긴 소설, 1Q84가 퍼뜩 생각났다. 같은 작가의 노르웨이의 숲을 재밌게 읽었고, 내가 신뢰할만한 사람 몇 명이 1Q84를 그저 '막힘 없이 읽히는 재밌는 소설'이라고 추천하니, 이것저것 재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한 이야기에 빠져 몇 주를 보내다 보니, 소설 속 이야기 프레임 속에 내 생활이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겨울에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깃털 이불을 덮은 느낌.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양각의 태세에 따라 현실의 모양도 음각되어 바뀌는 듯했다. 소설 속 인물이 느낀 감정을 헤아리다 나도 모르는 새 잠들고, 의무감에 하는 일이 아닌 읽고 싶은 소설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소설의 리듬에 일상의 리듬을 맡길 수 있는 것이 긴 소설의 매력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에 이어서 두 번째다. '하루키 월드'라 불리는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는데, 아마 그건 충실한 묘사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자유로움으로 이루어진 월드가 아닐까.


'자유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명제의 역, '제약이 따르면 자유롭다'는 명제는 일반적으론 거짓이겠으나, 창작의 세계에 한정해선 참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자유가 주어지면 창작에는 오히려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소설 쓰기는 그만큼 고통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제약이 따르면 자유롭다'는 명제는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을 감상하는 태도에도 들어맞는 듯하다. 모든 장면을 시각화한 영화에 반해, 활자로 이루어진 소설의 매력은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데 있다. 그렇다면 장면과 심리 묘사를 생략하여 상상력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치는 작가보다, 구체적이고 충실하게 묘사하여 상상력을 제약하는, 하루키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독자는 더욱 깊은 자유를 느낀다. 어쩐지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하루키 월드'는 그런 세계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1·2권


1Q84 1권과 2권


1Q84 3권을 제외하고 2권까지만 읽었다. 1Q84는 애초에 2권의 열린 결말로 마무리됐고, 3권은 외전 격이라고 한다. 4권도 예정에 있다고 뉴스까지 나왔지만,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걸 보니 그냥 작가가 쓰고 싶을 때 4권을 쓴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대하지 않는 편이 독자로서 속 편하다. 애초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유분방한 작가다.


2권에 수록된 아오마메와 덴고의 마지막 장을 각각 읽으며,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느껴 3권은 다음에 기분 내킬 때 읽기로 했다는 명분일 뿐, 속마음은 어제 막 도착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싶어서 2권까지만 읽기로 했다. 아무튼 작가가 4권을 쓰고 싶을 때 쓰듯이, 나는 3권을 읽고 싶을 때 읽기로 한다.


1Q84의 사건 전개는 짧고 명료하다. 반면, 인물과 인물이 처한 상황, 사건이 전개되는 공간 묘사는 지나치다, 때로는 지루하다, 라고 느낄 정도로 세세하며 장황하다. 마치 호기심이 일절 들지 않는 무료한 1분짜리 영상을 3분 분량의 슬로우 모션 영상으로 천천히 보니, 일반 속도로 봤을 때 무심코 지나쳤을 디테일한 부분 하나하나에 의미를 발견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파편적이어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로 꿰어지진 않는다.


독자인 나의 상상력은 작가가 묘사하는 장면들을 자유롭게 그려나가 생생한 하나의 월드를 구축했다. 소설 속 이야기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같은 처지지만, 그 묘사에 현실의 감각과 생동감이 깃들어 있어서 유치하다거나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마침 소설 속 두 주인공이 나처럼 30대를 막 앞둔 나이여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처한 고민에 깊이 공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의 적당한 때에 적당한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나는 살면서 어느순간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느낀 적이 몇 번있다. 처음엔 꿈이나 사랑 따위의 어떤 강렬한 힘에 이끌려 주위를 둘러볼 틈없이 한발한발 그곳으로 깊숙히 들어섰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다시 꿈꾸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처럼 고독해졌다.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영원한 꿈과 사랑을 결국엔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젠 욕심 없이 살고자 마음먹었다. 그게 막 서른을 앞둔 요 몇 개월 안의 일이다. 소설의 말을 좀 더 빌리자면 어찌 됐든 나는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저 "앞으로 취할 행동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호기심을 갖고 지켜볼 뿐"이다.


1Q84는 내가 근래에 느낀 이런 기묘한 순간을 두 개의 달과 공기 번데기라는 상징적인 요소로 표현하고 있다. 서른을 앞둔 두 주인공 덴고와 아오마메는 의지할만한 친구나 가족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지만, 첫사랑인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다. 이들은 우연한 계기로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비현실적인, 어쩌면 허구인 1Q84년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삶에서 유일하게 알아 내야 할 의미라 할 수 있는, 서로가 공유한 한 풍경을 향해, 서로를 찾아 나선다. 고독한 현실을 벗어난 허구의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것.


1Q84 2권은 둘의 만남을 눈앞에 두고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3권에서 둘이 만나는지 어쩐한 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만난다고 해서 그들이 어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마침내 행복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2권까지 읽은 나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두운 긴 터널로 막 들어선 내 입장에선 더욱 그런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적인 언어


하루키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작품에 대해 몇 마디 잇지 못한다. 그저 기묘하지만 좋았다고 한다. 오히려 작품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은 듯한 걸 보니, 하루키 월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형언할 수 없는 느낌만 가졌을 뿐, 그것을 설명할 적절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나 역시 그의 소설이 좋은데, 그 감정에 딱 잘라 말하기 힘든 애매한 구석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문사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1Q84 작품을 쓰며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인 언어'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사적인 언어'란 한 사람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언어라고 하며, 비트겐슈타인은 '사적인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문제 삼으며 논쟁을 이끌었다고 한다.


1Q84의 첫 장면. 꽉 막힌 도쿄 수도고속도로에 갇힌 아오마메에게 비상계단 출구를 알려준 택시 기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고 나면 일상 풍경이, 뭐랄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이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하루키가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들을 최대한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평소와는 다르게 보이는) 사적인 언어란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독자인 나도 최대한 노력해서 내면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더욱 힘써볼 용기가 생긴다. 비트겐슈타인이 문제 삼은 '사적인 언어'가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정된 언어에 매몰된 우리의 사고도 딱 거기까지인지도 모르니까. 내면에 느낀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 구체적인 언어로 확장하다 보면, 내가 그동안 매몰되었던 꿈과 사랑의 한계도 확장되어, 앞으로의 삶의 의미가 되어줄, 새로운 장면을 이끌어 낼 지 모를 일이다.


맥주 한잔하고 쓰는 글이라, 내일 아침에 이불킥할 느낌이다. 내일 아침 제정신에 읽는 이 글이 현실처럼 와닿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