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14.
한국 소설 중 정말 재밌다고, 친구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직 없다. 내가 한국 소설에 애정이 없는 걸 보면 혹시 문화 사대주의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다. 북 칼럼니스트 이다혜가 지난달 GQ에 썼던 칼럼 소설가 최은영을 한번 키워보자를 읽으며 그녀가 대해 온 한국소설에 공감했다. '노란 장판지 문학'으로 상징되는 한국 소설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자의식이 강하다.
종종 주인공(저자)의 독백에 가까운 한국 현대 소설을 읽다 보면, 흥미 없는 사람에게 붙잡혀 억지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기분이다. 한국 작가는 아니지만, 그 대단하다는 문호 헤르만 헤세(데미안)나 다자이 오사무(인간 실격) 역시 그중 하나다.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자면, 어떤 부분이 위대한지 모르겠다. 그들의 소설은 당시의 시대와 그들의 생애와 함께 읽혀야 위대한 건 아닐까.
임경선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을 읽고 작가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즐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이다혜 칼럼 [소설가 최은영을 한번 키워보자]의 결말도 이렇다. "이런 작가(최은영)와 함께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와 시대를 호흡하며 성장하겠는가." 나 역시 내 생의 타임라인을 공유하며 함께할 동시대 작가를 만나길 바란다. [쇼코의 미소]를 재밌게 읽었으니, 그게 최은영일지 모르겠다.
손원평 소설 [아몬드] 표지 │ 창비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읽었다. 한국 소설에서 잘 느끼지 못했던 세련된 느낌이 좋았다. [아몬드]는 선천적 감정표현불능증을 앓는 주인공 윤재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삼는 곤이를 만나며 감정을 알아 가는 이야기다.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단편영화 각본과 연출가로 활동했던 저자답게 소설의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어 잘 읽혔다.
하지만 소설 속 사건의 개연성이 작위적이고 인물들이 연극적이라고 느껴서 아쉬웠다. 지금 푹 빠져 읽고 있는 소설 [아버지와 이토 씨]의 저자 니카자와 히나코는 희곡 작가로 활동하던 중 "대화와 대화 사이를 나의 언어를 채워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비추어 [아몬드]의 대화와 대화 사이에 손원평 작가의 언어와 시각이 더 풍부했다면 좋았을 뻔했다.
영화 [지니어스] 스틸 이미지
영화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를 조력한 당대 최고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와 천재 작가 토마스 울프의 이야기를 담은 [지니어스]다. 자신의 삶에서 느낀 풍부한 감정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묘사하는 토마스 울프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 같은 작가. 그는 유일하게 맥스 퍼킨스에게 의지하고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를 넘어 삶을 공유하는 친구로 거듭난다.
맥스 퍼킨스는 두 편의 소설을 성공적으로 쓴 뒤 기고만장한 토마스 울프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그동안 참아온 건 자네와 자네 글이 가치 있다고 믿어서야. 그런데 누가 자네를 견딜 수 있을까? 자네의 수많은 말과 그 아름다운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각은 찾아볼 수도 없어. 그건 타인의 눈을 보고 공감해야 얻어지거든. 언젠가 깨닫길 바라네. 그럼 스콧의 글보다 다섯 배는 훌륭해질 테니까."
어쩌면 토마스 울프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능력은 탁월했더라도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했을지 모른다. 골방의 누런 장판에서 쓰여진 소설이 아니라 타인의 눈을 보고 공감하며 쓴 스콧 피츠제럴드와 같은 소설을 동시대 작가를 통해 만나고 싶다. 그런 소설을 더 더 더 많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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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밑줄
나는 평범함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평범해지는 것에.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 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 사랑.
─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 예쁨의 발견.
자기네들 맘대로 낳아 놓고 왜 자기들이 정한 미션을 내가 수행해야 되는데? 후회할 거라고 자꾸 협박하는데 후회를 해도 내가 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