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5.
중학교에 막 올라갔을 무렵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집이라 해봐야 제가 살던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지만 환경이 바뀐 탓인지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세상 모든 것이 달라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줄곧 "인생에서 친구는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것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속으로 '같은 반 친구만 30명이 넘고, 매일 보는 동네 친구들이 6명이나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흘려 들었죠.
나이가 들고 관심사가 뚜렷해지며, 또 하는 일이 정해지며 자연스레 친구 관계도 좁아졌습니다. 고향에서 동네 친구들을 우연히 마주치면 형식적인 대화를 하고 어색한 마음에 얼른 -"다음에 술 한 잔 하자"는 빈 말로- 작별인사를 건네곤 합니다. 친구라는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깨닫는 순간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같은 동네에 살거나 자주 만나면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던 것 같은데, 대학에 진학한 이후론 비슷한 '관심사(미술·디자인)'를 공유하는 사람들만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분 이상 대화하기도 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회생활에 들어선 이후론 사람 관계가 더 좁아졌습니다.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더라도 '삶의 태도'가 같지 않으면 친해지기 어렵게 된 것이죠. '이러다간 정말 할아버지의 말대로 한 명의 친구만 남기도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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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한 명의 친구가 소중하듯, 한 명의 작가 또한 소중합니다. 동시대를 호흡하는 어느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 삶에 깊은 자극을 준다면 말입니다. 함께 세상을 바라보며 성장하는 작가의 문장에서, 삶에서 느끼는 깊은 감동은 소중한 친구와 견주어도 손색없습니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위안과 동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가는 많았다… 그에게 유일하게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문학적 동반자는 바로 레이먼드 카버였다.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에게 시대를 함께하는 작가이자 깊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작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제로 딱 한번 만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승이나 동료 없이 묵묵히 혼자 글을 써왔던 그에게는 레이먼드 카버의 존재 자체가 따듯한 위로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중에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표지
임경선 작가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을 읽었습니다. 지난주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하는 선물로, 호텔 방에서 밤새 읽을 책 하나를 찾았습니다. 처음엔 단편 소설집 <애니>를 너무 감명 깊게 읽어서 정한아 작가의 작품을 찾아보았는데, 완벽했던 <애니>의 표지와 달리 <달의 바다>와 <나를 위해 웃다>의 표지는 제게 선물하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침 알라딘 첫 페이지에 자동 추천 목록에서 올라온 매력적인 표지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을 보았죠.
그렇게 해서 사게 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표지, 책등 어디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뒷면에 한 번 언급되어있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생이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자서전을 읽는 것같이 그의 생각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임경선 작가는 스스로 "'왜 글을 쓰게 되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게는 여러가지 답이 마련되어 있지만 그중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에'라는 답은 혼자만 알고 지낼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무라카미 하루키를 사랑합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가 쓴 자서전 같은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이 책에는 <광고비평>, <문예춘추>, <주간 아사히>, <재즈랜드>, <부루터스>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소한 생각과 같이 동시대를 호흡하며 애착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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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이 아니었다면, 임경선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저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재즈 바를 운영하다가 야구를 보던 중 갑자기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에 먹은 뒤 곧 유명 작가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수없는 천재' 쯤으로 여겼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으니까요.)
책을 읽고 나니 마치 제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의 작품을 사랑해 온 팬이었고 긴 시간을 함께 공유해 온 것 같은 기쁨과 위안을 느꼈습니다. 그 시간을 임경선 작가에게 선물 받은 것 같아 참 고맙습니다. 제가 임경선 작가가 아니니, 제 삶에 있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의미는 그녀에게 있어서의 의미와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의 모든 책을 다 읽더라도 말이죠. 그러니 저만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다시, 정한아 작가가 생각납니다.
제발 정한아 작가의 다음 작품 표지는 마음에 들길 바랍니다. 부디 신경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