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5.
단편 소설집을 읽으면, 지금 읽는 이야기가 얼마나 남았는지 쪽수를 확인하곤 한다.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수록 마음이 쓰인다. '어떻게 이야기를 끝내려는 거지?'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 호흡이 가빠지더니, 이내 끝난다. 그리고 마음이 쓰였던 만큼, 호흡이 가빴던 만큼 여운이 남는다.
조수경의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은 유난히 호흡이 가빴다. 이야기는 서서히 속력을 높이며 나락으로 떨어진 채 희망도 없이 끝났다. 매 마지막 순간 참담하고 분한 심정이었다. 마치 우울함의 바닥을 짚고 다시 수면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심해에 쪼그려 앉아 아가미로 가쁜 호흡을 이어가는 작은 생명체가된 기분이었다.
조수경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 ⓓ이경진
잠들기 전 이야기 하나씩 읽었다. [할로윈─런런런]을 읽은 네 번째 날에는 주인공 미래처럼 악몽에 시달렸다. 왜 매일 밤 내가 이 이야기를 붙들고 있어야 하지, 라는 생각에 책을 덮기도 했다(결국은 다시 집어 들었지만). [유리]와 [지느러미]는 푹 빠져 읽은 반면, [사슬]과 [오아시스]는 결국 책장을 끝까지 넘기지 못했다.
소설이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끝내 희망과 긍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좋다. [작가의 말]을 읽으니 작가가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썼는지 그제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부서졌다. 더는 내려갈 곳도 없이 바닥에 다다랐다. 이제 부서진 조각을 이어붙이고 수면을 향해 오를 일밖에 없는 듯하다. 오직 그것만이 위안이 된 소설.
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떠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나는 떠날 사람이 누구인지 골라낼 수 있었다. 바퀴가 달린 가방이나 유난스러운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떠날 사람은, 뭐랄까, 떠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조리개의 움직임을 따라서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 장면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내 안에 박혀 있을 거라고는,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래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바짝 마른 입술만 깨물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내 안에 영원히 가둬두려는 것처럼 너는 내 말을 가로챘다.
엄마를 만나고 나면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듯이 어둡고 뻥 뚫린 부분들을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할 일이라든가, 하고 싶은 일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저절로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직사각형의 유리창을 보자 커다란 어항안에 갖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어항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