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뿐하게 읽는 콜럼 토빈 장편소설 <브루클린>

2016. 5. 12.

최근 콜럼 토핀의 장편소설 <브루클린>과 오쿠이즈미 하카루의 수필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를 연달아 읽었습니다.


<브루클린>의 경우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고 여운을 즐기고자 읽었는데, 영화를 봤던 게 아쉬울 정도로 문장이 담백하고 좋았습니다. 왜 아쉬웠냐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니까 문장의 맛이 반감된 것 같아서요. 콜럼 토빈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뉴욕 브루클린으로 취업 이민을 간 주인공 아일리시의 향수병과 사랑을 아주 담백한 문장으로 묘사했습니다.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나쓰메 소세키 전문가(?) 오쿠이즈미 하카루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과 수필을 어떻게 읽는 게 좋을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독서 안내서'입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작가와 함께 늙어가며, 일정한 시간을 두며 작품을 읽었겠지만(그래서 더 깊이 공감했겠죠?), 저희와 같이 그의 모든 작품이 앞에 주어진 후대에는 이처럼 일종의 안내서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는 '나쓰메 소세키' 보다 非 독서인구에 '소설의 맛'을 안내해주는 책이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백컨대 저는 26살에 취업하며 글을 쓰는 일을 하기 전까지 소설책을 국어 교재에 나온 작품 외에 하나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스위트 히어 애프터>(요시모토 바나나의 말랑말랑한 소설이 입문용으로 좋았던 것 같네요), 정한아의 단편 소설집 <애니>, 니시 가나코의 장편소설 <사라바> 이기호의 단편 소설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를 읽으며 소설의 재미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제가 왜 소설에 흥미를 못 느꼈는지, 그리고 지금은 왜 이렇게 매달리는지(밤에 어떤 이야기를 읽지 않으면 잘 준비가 안 된 기분이라니까요)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으니 알 수 있겠더군요. 그 이야기를 <브루클린>과 엮어 소개하고 싶습니다(아, 또 얘기가 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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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풀베게>는 한 장의 그림처럼 다양한 부분을 모아 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에 주목할 수도 있고, 뚜렷하지 않더라도 전체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쿠이즈미 히카루는 소설을 음악과 같은 소설, 그림과 같은 소설로 나뉜다고 소개합니다. 꼭 칼로 자른 듯 양분화할 순 없고 그것이 리듬감 있게 잘 섞여 있으면 좋은 소설이겠죠. 저는 소설의 흐름에 집중하지 못해 책장을 잘 못 넘기는 타입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시도해도 전개가 되지 않아 '나는 독서에 취미가 없군.'이라며 책을 덮어버렸던 겁니다. 하지만 소설은 회화처럼 부분적인 장면에 집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제 그 장면을 보는 눈을 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루클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일리시는 다시 매장으로 돌아가 방금 일어난 일을 멈추거나 신부가 말을 못 하게 막을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플러드 신부에게 여기서 나가라고, 다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말할 뻔했으나,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여기 있었다. 그녀는 신부가 한 말을 이미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고향에 있던, 마음으로 크게 의지했던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신부에게 전해 들은 아일리시의 심정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아일리시는 큰 충격을 받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부정하고 싶은 절박한 심정에 마음속으로 시간과 장소를 이리저리 옮겨 보지만, "그는 여기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라는 문장과 함께 담담히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관찰자인 독자, 저는 그 문장을 통해 그녀의 심정에 더 다가가게 되죠. 그 적막함이 흐르는 공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이야기의 흐름에는 상관없는, 꼭 없어도 내용은 이어지지만, 마치 회화 속 붓 터치 같은, 이런 입체적인 장면이 있어서 소설이 더욱 빛나고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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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야기를 무시하고 문장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방금 말한 '회화적인 소설'과 비슷한 얘기일 수 있는데, 소설에는 문장의 맛이 있는 것입니다. 문장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면 굳이 애써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편이 이야기는 더 편하게 숙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소설책을 읽는 재미는 문장의 매력을 찾는 데 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루클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토니, 짐, 어머니, 이 세 사람 모두 그녀가 상처만 입히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빛과 명쾌함으로 둘러싸인 순수한 사람들이고, 그들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어둡고 불분명한 그녀 자신이므로.


 토니와 결혼을 한 후 고향인 아일랜드에 다녀오기로 한 아일리시가 고향에서 안정된 삶을 약속하는 새로운 사랑 앞에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갈등하는 심정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그러면 안 되지 싶다가도, 이렇게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을 적확하게 담아낸 문장을 마주하면, '아, 괴롭겠구나, 나도 모르겠는걸'이라고 공감하게 됩니다. '이런 게 뛰어난 문장이다.'라고 꼭 집긴 제 내공이 부족하지만, 이런 게 뛰어난 문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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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설을 읽는 재미를 알아갑니다. 오늘 밤부터는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기 시작할 겁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작품을 썼는지 빨리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에서 저자가 각 장을 이런 식으로 끝내길래 저도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