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 <죽는 게 뭐라고>

2016. 1. 3.

신정 연휴를 맞아 고향에 다녀오는 길이다(어쩐지 고향에 다녀오면 꼭 블로그를 적게 된다). 고향으로 출발하는 전날에는 주문했던 <바닷마을 다이어리> 아날로그 사진집을 받았다. 사진이 좋아서 영화의 감동이 내 삶으로 확장된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에서 들으려고 영화 O.S.T도 구매했다. 역시 좋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시작(가족을 버린 아버지)부터 끝(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음식점 주인, 타카노 히데코)까지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가족애 벚꽃처럼, 불꽃처럼 빛나는 영화다. 네 자매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인지 한 번 보고서는 전체 그림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기분인데, 몇 번 더 볼 기회가 있고 생각이 정리된다면 블로그에도 감상평을 남기고 싶다.


고향에 가면 아버지 가게 일을 돕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돕는다곤 하지만 가게에서 시간만 보내는 정도라 책이 없으면 지루해서 버틸 수 없다. 그래서 매번 고향에 가기 전 책 쇼핑을 한다. 이번에 산 책은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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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뭐라고> 표지


이 책은 <사는 게 뭐라고>와 함께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저자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쓴 에세이집이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로 일생을 살았던 그녀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죽음에 관한 책이니 진지하고 우울할 것이라는 예상 밖에 유쾌하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담배를 마음껏 피우고 덜컥 스포츠카를 사며 건장한 남성의 매력을 마음껏 즐긴다. 예정된 시한을 넘기고 당장은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살아갈 돈을 다 써버렸다며 머쩍게 웃을 정도로 여유롭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마다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몇해 전 쓰러지신 이후로 치매증상을 앓고 있다. 성격이 불같았는데, 치매를 앓게 된 이후로 아이같이 순수해졌다. 전 같았으면 덜컥 화를 낼 상황에도 허허, 하고 웃고 넘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성격이 푸근해져서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난 뭔가 할아버지 같지 않아서 슬프다. 같은 질문을 계속해고, 내가 누구인지 계속해서 확인하는 할아버지를 대하고 있으면 이미 할아버지를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책은 꽤 두서없다. 했던 이야기가 반복되기도 하고, 옅게 얽힌 여러 이야기를 오가서 문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문장은 벚꽃처럼, 불꽃처럼 생명력이 넘친다. '어쩌면, 저자는 막 쓴 걸까?' 저자의 생각을 쫓다 보면 충분히 이런 유추가 가능하다. 보통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글을 쓴다면, 완성도가 높은 뛰어난 걸작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녀라면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썼을 것만 같다. '죽는게 뭐라고'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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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밑줄


38쪽

아아, 지겹다. 죽기를 기다리는 것도 지겹다.

기다리는 게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거미가 되어 그물을 펼치고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54쪽

이제 곧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도통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일에 대해서뿐 아니라 세상만사에 의욕이 없어진다.

하지만 살아 있으면서도 아무런 할 일 없는 건 지루하다.


61쪽

나는 세상만사에 감탄하고 싶다.

요즘은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야나기바 도로시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핏대를 세우는 연기에 감탄한다. 어금니가 닳아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을 멈출 수 없다.

이제 곧 죽는데 이런 인생을 보내도 괜찮을까.


97쪽

(히라이, 쓰키지 신경과 클리닉 이사장) 사노 씨는 병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말씀드려도 별로 동요하지 않으셨지요. 작가라는 직업 때문인지 '인생이란, 나 자신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스스로 잘 정리해둔 덕분이겠죠.


현실의 감각을 놓지 않고 이성적으로 '죽음을 보고'한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막연하고 두렵게 느껴지던 죽음이 꽤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두 분류로 나눈다면 저자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차분히 준비하는 사람과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잘 준비해 두신걸까? 주위 수많은 죽음을 옆에서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혹시 치매로 그 소중한 생각들을 잊으신걸까? 어렵다. 다만 외롭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너무 일찍 걱정해 드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