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9.
서점에서 정한아의 소설집 <애니>를 집어 든 건 제목 때문이었다. 먼저 우디 앨런의 영화 제목인 애니(홀), 그리고 윤종신 8집 타이틀이었던 애니. 영화와 음악에선 애니는 치명적 매력을 지닌 여자이고, 주인공은 그녀를 사랑하는(했던) 찌질이다. 나는 그런 찌질함에 동질감을 느끼며 빠져들었고, 애니란 이름과 글자 모양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집어든 것.
어머니께.라고 시작되는 정한아의 소설집 <애니>는 총 여덟 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다. 여덟 편 모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결핍을 겪는다. 두 번째에 수록된 소설인 애니는 젊었을 때 유명한 영화배우였던 여인이 전성기 때 연기했던 배역 이름이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는 한 남자에게 운전을 배우며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데, 결국 운전을 배워 도착한 곳은 황량한 형무소의 높은 돌담 앞이다. 여덟 편의 소설 모두 결핍이 해결되지 않고 애니의 마지막 장면처럼 높은 벽 앞에 마주 선 듯 끝난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을 몰래 뒤쫓다가, 마지막 벽 앞에서 뒤돌아본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고, 결국 내 안의 결핍도 꺼내 보였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던 것 같다.
왼쪽부터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문학동네 <애니> 정한아 지음, 문학과 지성사
정한아의 애니를 읽기 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를 읽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알게 된 것은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때문인데, 영화를 보고 그를 알았다기보다, 그의 에세이가 SNS로 소개될 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감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식이다. 영화 속 아역 주인공을 내 프로필 이미지로 할 만큼 너무 감동을 받았던 터라 금세 책에 빠져들었다.
에세이는 그가 감독한 영화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걸어도 걸어도(2008), 아무도 모른다(2004)에 관한 사색과 에피소드들로 구성된다. 에세이 자체가 뛰어나다고 느끼진 않았지만, 하나. 그는 작품에서 선과 악에 어떠한 심판이나 관점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곧장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다시 보고 뒤이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를 연이어 보았다.(걸어도 걸어도는 정한아가 <애니>를 어머니를 위해 쓴 것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잔잔함 속에서 울림이 큰 작품들.
정한아의 단편소설 여덟 편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세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소화해서 일지 모르지만, 두 작가가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정한아의 이야기가 그렇듯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는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주인공은 어떤 결핍 속에서 헤맨다. 결국 이야기는 결핍이 해결되지 않고, 주인공이 어떤 새로운 상황에 놓이며 끝난다. 독자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 이것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이 공유하는 관점일까.
그들의 작품을 통해 정리된 나만의 생각은 결국 내 삶의 선택들을 결정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선하든 악하든 그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도 그들에게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