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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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설레는 일 없이 무료한 일상을 보낸 때가 있었다. 매일 특별한 일 없는 그저 그런 하루하루. 그때 나는 애써 걱정거리를 만들어내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 그런 모습을 스스로 자각한 뒤 생각해보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줄곧 일정 수준의 걱정을 안고 살아왔던 것 같았다.


왜 그럴까, 지난 걱정들을 복기해 보았다. 어쩌면 내가 만든 걱정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즐긴 걸까. 이 무료함을 못 견디는 마음으로 인해 스스로가 얼마나 큰 고난에 빠지고 망가질 뻔 했었는지도 희미하게 기억 속에 떠올랐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걱정에 빠져들고야 마는 그 어쩔 수 없는 힘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다. 넘어선 안 될 선을 보란듯이 가뿐하게 넘어서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선을 넘으려는 자아와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자아의 다툼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만 같아 무기력에 빠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위험하고 아찔한 걱정을 찾는다. 나이가 든다는 게 다 그런 걸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 1 재능있는 리플리〉


위험하고 아찔한 걱정 한가운데 있을 때 나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이 걱정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적인 생각이 든다. 하이스미스의 작품 속 캐릭터들이 극한의 스트레스(자신들이 만들고 빠져든) 속에서 여유를 찾고 정면 돌파하는 모습들에서 희열을 느낀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1 재능있는 리플리〉를 읽고든 감상. 역시는 역시다. 〈열차안의 낯선 자들〉, 〈캐롤〉, 〈이토록 달콤한 고통〉에서 느낀 책장을 넘기는 손끝의 짜릿함을 다시 느꼈다.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만들어낸 작가의 대표작. 높은 성취욕과 무능력. 피해의식과 열등감. 순수한 악. 실재에 상처받고 지쳐서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싶을 때. 그렇게 하면 내가 정말 미친 사람일까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게 될 때. 그럴때면 되려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미친 사람의 용기에 존경심이 든다.


내가 푹 빠져 감정 이입한 리플리 캐릭터의 사고방식과 행동. 그가 말하는 대로 나의 지난 행동을 해석하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어떤 작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곧 그 작가가 만든 캐릭터를 거울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얼마 전 친구가 “힘들 때 찾게 되는 사람이 너의 미래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하이스미스가 나의 미래인 걸까. 힘들 때 친구보다 책이 그리운 건 왜일까. 5부작으로 구성된 리플리 시리즈의 1권을 읽었다. 꼭 필요할 때. 나머지 4권을 아껴서 읽고 싶은 시리즈다.



그는 산마르크 대성당에 가서 안을 둘러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경 때문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신원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더 오랫동안 미룰수록 결과는 더 나빠질 것이다. 그는 대성당을 나오면서 경찰에게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는 서글플 마음으로 물었고, 기분이 침울했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톰 리플리라고 밝히는 게 평생 해온 어떤 일보다 더 서글픈 일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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