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5.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일단 펼치면 몇 장이고 읽어나간다. 〈노르웨이의 숲〉을 접한 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되어 그의 소설을 꾸준히 읽고 있다. 대표작인 〈1Q84〉를 읽고 난 뒤 당시 출간된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상영할 당시엔 원작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출간되었을 당시 인터뷰를 했던 가와카미 미에코가 〈기사단장 죽이기〉가 출간된 뒤 또다시 그를 인터뷰했다. 총 네 번에 걸친 긴 인터뷰를 모은 책이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란 제목으로 나왔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표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거로 알려졌다는데, 이 책에서 완전히 고삐를 풀고 자신과 작품에 대해 말한다. 아마 그럴 수 있었던 건 가와카미 미에코의 질문 덕분이었을 것. 에두르는 답변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녀의 질문에 긴장을 하고 답한 기색이 역력하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생산적인 분위기가 의미가 인터뷰 내내 가득하다.
책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그가 아주 개인주의자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아주 무책임하다는 것. 개인주의적인 것은 여느 작가도 그럴 것이라 놀랍지 않았지만, 그가 인터뷰에서 내뱉는 답변들에서 느껴지는 작품에 대한 태도가 아주 무책임해서 놀랐다.
머리로 해석할 수 있는 건 글로 써봐야 별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는 해석이 불가능하니까 이야기인 거죠.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면서 작가가 일일이 포장을 풀어헤치면 재미고 뭐고 없어요. 독자는 맥이 빠질 테고요. 작가조차 잘 몰라야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의미가 자유롭게 부풀어나간다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무책임하다고 느낀 한 부분은 꼽자면, 〈기사단장 죽이기〉를 쓰며,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 개념인 ‘이데아'에 대해 깊이 알지 않은 상태로 소설을 탈고했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 그런데 인터뷰를 읽는 동안, 그런 그의 태도가 기분 나쁘기보다 오히려 반가웠다.
반가웠던 이유는 그가 무책임하게 썼기 때문에 독자인 나 역시 무책임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특정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책임을 지운 요소들을 마주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독자는 지나치게 긴장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뒷부분으로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엔 메타포가 유독 많긴 하지만 책임을 지우는 느낌은 전혀 없고, 오히려 책장은 계속해서 가볍게 넘어간다.
요는 스스로를 믿는 일이죠. 소설을 쓴다기 보다, 부엌에서 굴튀김을 하나하나 튀기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요.
작가의 메시지를 전할 책임이 없는 작품은 작품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고, 독자는 그런 작품의 자립성과 자유로움 덕분에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이것이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우물’이 아닐까. 다만 그가 자신이 쓴 글을 잘 기억하지 못하듯, 독자인 나 역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