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 / 소설로 빚은 상실감, 하루키는 느낌을 씁니다

2016. 12. 26.

평일 밤에는 소설책을, 낮에는 실용서나 수필 읽는 걸 좋아한다. 뭔가 균형 잡힌 독서 생활을 하는 것같이 느껴져서 기분 좋다. [노르웨이의 숲]을 밤에 읽어 나가는 동안 실용서 [서평 쓰는 법]을 함께 읽으며 내 글쓰기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독서 일기 쓰는 법


내가 독후감을 쓰는 데 따로 규칙은 없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쓴다. 물론 마음에 들어야 한다. 책을 읽으며 감명 깊은 구절은 밑줄을 긋고 뭔가 느낀 점이 있으면 메모를 한다. 그리고 그걸 최소한의 논리로 적절히 섞어서 글을 쓰는 거다. 유독 의식하는 게 있다면 '내 삶과 연관 짓기' 인데 그래야 독서가 더욱 의미 있는 것 같아서다.


이원석 서평가가 쓴 [서평 쓰는 법]은 서평이란 무엇인지로 시작해 어떻게 쓰는 지까지 다양한 예시와 함께 서평에 모든 걸 설명한 책이다. 과연 서평이란 기술과 수많은 연습이 필요한 전문적 글쓰기라고 느꼈다. 내가 쓰는 독서 일기는 서평까진 못 되고 독후감 정도에 불과하지만, 독후감에도 유효한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독서의 첫 결실은 평가가 아니라 요약"이란 말이 인상 깊었다(워낙 요약을 못해서).


[노르웨이의 숲]을 다 읽으면 맛깔나게 요약해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무리였다.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올곧게 뻗어가다가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인물이 겪은 상실의 단편을 느슨한 끈으로 연결하며 어떤 느낌을 공유하는 소설이라서 그랬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독서하고 요점을 파악하는 좋은 독자의 눈이 부족한 걸까. 아무튼 [노르웨이의 숲] 요약을 밤새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고 결국 포기했다.


노르웨이의 숲, 30주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표지 ⓒ민음사 / 이경민 황일선


책을 고르는 법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의 최우선 순위가 디자인이다. 그다음이 내용이 흥미로운가이다. 기욤 뮈소의 책이 재미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내가 지금껏 읽지 못하는 이유가 표지 디자인이 내 취향과 맞지 않아서다. 책은 읽는 시간 보다 보는 시간이 더 많은데, 마음에 들지 않은 디자인의 책을 사면 어쩐지 가격의 절반도 못한 것 같지 않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재밌게 읽으며 번번이 실패했던 그의 소설을 평생 안 읽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민음사가 [노르웨이의 숲] 출간 3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이렇게나 아름다운 디자인의 책을 내놓으니 어떻게 안 읽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지정한 것으로 알려진 강렬한 빨강과 초록을 엷게 그러데이션 한 표지가 예쁘다. 한정판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고 [노르웨이의 숲]으로 기꺼이 몸을 던졌다.


계산해보니 한 시간에 50여 페이지를 읽었다. 그러니까 오백 쪽 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열 시간에 걸쳐 다양한 장소를 오가며 읽었다. 삼백 쪽 정도는 냉장고 소리만 웅얼대는 적막한 새벽 침대에서 읽었고 나머지 이백 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친구 집 거실 소파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틈틈이 읽었다. 다양한 풍경 속에서 소설을 읽어서인지 이야기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노르웨이의 숲 표지 ⓒ민음사 페이스북


하루키의 소설 감상


[노르웨이의 숲]에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서정적인 감상이 이야기를 단단히 지탱한다고 할 만큼 유난히 아름답고 섬세한 묘사가 많았다. 이는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중히 여기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문학적 장치 같았다. 이야기의 진도와 크게 상관이 없는 아름다운 묘사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책을 잠시 내려놓고 소설 속 풍경이 내가 책을 읽는 주변 풍경에 녹아들 수 있도록 가만히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자가 소설 속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통해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거로 봐서 아마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섬세한 묘사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내가 좋아라 하는 한 블로거는 [노르웨이의 숲]이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적도 있는데, 나도 공감한다. 두 작가의 작품 모두 읽는 동안 서로 유사한 문학적 황홀감을 느꼈다.


노르웨이의 숲 책등 ⓒ민음사 페이스북


노르웨이의 숲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 와타나베는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 나오코와 미도리를 중심으로 절친 기즈키,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 레이코, 뇌졸증을 앓는 미도리의 아버지,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와 그의 애인 하쓰미 등 개성이 확실한 인물들과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조금씩 성숙한다. 워낙 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얽혀 있어서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다, 라고 딱 잘라 말하기 벅차다.


눈에 띄는 건 소설 속 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죽는다는 점. 기즈키와 나오코, 하쓰미는 자살을 하고, 미도리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죽는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와중에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미도리다. 와타나베에게 먼저 호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미도리는 활기 넘치는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소설 후반부 나오코의 자살로 인해 깊은 상실감에 젖은 와타나베가 정신을 추슬려 돌아갈 곳도 미도리뿐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무언가를 상실한 씁쓸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소설은 독일 함부르크에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주인공 와타나베가 열여덟 해를 거슬러 올라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라고 말했던 나오코를 회상하며 시작된다. 소설의 마지막이 이야기를 회상하는 '현재'로 되돌아가지 않고 어딘지 모를 곳에서 방황하며 끝났기 때문에 더욱 허망했던 것 같다.


와타나베는 왜 "또 독일"에 갔을까? 미도리와는 어떻게 된 걸까? 하루키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작가인 것 같다. 먼 이국땅에서 상실감으로 가득했던 젊은 날을 일방적으로 회상하는 이 이야기는 20대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는 내게 먼 미래를 회상하는 기이한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서른일곱 살이라, 그때 난 무엇을 잃고 슬퍼할까.


책 속 밑줄 (모음)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그 때문에 우리는 아주 먼 길을 돌아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삐둘어지고 말았어.


나오코가 가 버리고 나는 소파 위에서 잠을 잤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나오코의 존재감 속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부엌에는 나오코가 사용하는 그릇이 있고 욕실에는 나오코가 사용하는 칫솔이 있고 침실에는 나오코가 잠드는 침대가 있다. 나는 그 방 안에서 세포 구석구석 피로의 한 방울까지 짜내듯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방황하는 나비 꿈을 꾸었다.


시간이 흘러 그 작은 세계에서 멀어질수록 그날 밤의 일이 진짜로 있었던 건지 아닌지 점점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던 것 같고, 환상이라 생각하면 환상인 듯했다.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세부까지 생생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오코의 몸도 달빛도.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감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 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또 가을이 왔다. 바람 냄새나 햇빛 색깔이나 길섶에 핀 작은 들꽃이나 조그만 소리의 울림이 나에게 가을 소식을 전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기즈키는 열입곱인 채로, 나오코는 스물하나인 채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