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집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 상실에 대처하는 우아한 자세

2016. 12. 15.

추천의 말은 말 그대로 잠정적 독자에게 책을 추천하는 글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 5편을 모은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의 추천의 말은 임경선 작가가 썼다. 그가 쓴 추천의 말은 내가 그동안 읽었던 것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다.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추천의 말은 추천의 말답게 책 앞쪽에 쓰였지만, 나는 추천의 말을 가장 나중에 읽었다. 다 읽은 책을 추천받은 셈(그래서 또 읽으려고). 그렇게 한 이유는 추천의 말에 임경선 작가의 작품 감상이 곁들여져 있어서, 소설을 다 읽은 뒤에 내 감상과 비교해 읽으면 더욱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름다운 상실의 시대


민음사에서 쏜살 문고 시리즈로 펴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집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에는 표제작인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분별 있는 일], [기나긴 외출], [해외여행], [다시 찾아온 바빌론]이 순서대로 실렸다. 20세기 초를 풍미한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는 경제 호황과 대공황의 격변기를 살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임경선 작가는 추천의 말에서 책에 실린 5 작품을 두고 호황과 대공황의 풍경인 ‘재즈 시대의 메아리’를 고스란히 들려주는 작품이라 소개했고 그에 걸맞게 추천의 말에 [아름다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의 소개대로 책에 실린 작품들은 상실감과 쓸쓸함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집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표지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집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기 전 같은 저자의 [위대한 개츠비]를 흥미롭게 읽었음에도 작가에 대해 몰랐다. (작품을 안 읽고도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은 텐데) 추천의 말까지 건너뛰고 소설을 읽은 탓에 시대 배경이나 작가의 처지를 모른 채 작품만을 읽은 것이다.


나는 쓸쓸한 상실감이 유난히 짙은 [다시 찾아온 바빌론]이나 [해외여행]보다는, 로맨스를 다룬 [분별 있는 일]과 [기나긴 외출]이 더 좋았다.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작가의 풍부하고 극적인 상상력에 매료되어 몽환에 젖은 채 황홀히 읽었다.


내가 호황기를 몸소 느껴보지 못했거나 인생의 쓰라림을 아직 제대로 맛보지 못한 탓에 짙은 상실감에 공감하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나의 아버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다시 찾아온 바빌론]과 [해외여행]을 읽으면 더 마음에 와 닿을 것 같다. 한강의 기적을 떠올리며.


[분별 있는 일]과 [기나긴 외출]도 상실감이 느껴지긴 하나 물질로 인한 ‘쓸쓸한 상실감’이 아닌, 사랑으로 인한 ‘가슴 절절한 상실감’이다. [기나긴 외출]은 퇴원 전 마지막 외출을 앞둔 부인이 자신을 데리러 오던 길에 남편이 사고로 죽은 것을 알게 되지만, 매일 같은 차림으로 외출 준비를 하며 남편을 기다린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 그리고 [분별 있는 일]은 경제적 이유로 청혼에 실패했던 주인공 조지가 성공한 뒤에 다시 사랑을 붙잡으려 하지만 마치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했던 시간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 뉴욕에서 재회한 바비와 보니가 키스하는 씬을 준비중인 배우들과 우디 앨런


카페 소사이어티 그리고 상실에 대처하는 우아한 자세

관찰자 시점으로 20세기 초반의 사랑 이야기를 낭만적이고 우아하게 묘사해서일까. [분별 있는 일]을 읽으며 우디 앨런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가 연상되었다. 우디 앨런이 [분별 있는 일]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아름다운 미장센의 연속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유려한 묘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우디 앨런은 은연중에 피츠제럴드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20세기 초반의 어떤 우아함에 영감을 받았으리라(내 멋대로 하는 생각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말하지 않았나,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라고.


[분별 있는 일] 소설 속 조지가 “아무리 영원히 찾아 헤매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만큼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존퀼과 키스를 하는 장면은 어쩐지 [카페 소사이어티] 영화 속 보니와 바비가 뉴욕에서 재회해 키스하는 장면과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며 멀리 떨어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글이 시대를 넘어 꾸준히 사랑받는 건 아마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음과 사랑을 상실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문장은 상실감을 우아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다.


리뷰의 마지막을 추천의 말에 쓰인 임경선 작가의 [분별 있는 일] 감상 일부로 대체한다. 너무 좋아서. “인간이 같은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잔인하도록 슬픈가. 이미 많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절로 변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아이러니를 품고 인생은 또 흘러간다.”


* * *

책 속 밑줄


그래, 모든 이들의 젊음은 꿈이야. 일종의 화학적 광기야. 미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이것은 그가 그동안 연습해 두었던 대사 중 하나였다. 기선을 타고 오면서도 꽤 괜찮은 대사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그녀에 대해 느낀 애정에다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에 대한 어물쩡한 태도를 보여주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치 무거워진 공기처럼 과거 일이 사방에서 그를 애워싸고 있는 시점에서 그 말은 왠지 연극적이고 김빠진 맥주처럼 진부하게 들렸다. [분별 있는 일]


세상에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시간과 그녀의 시간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 그는 아무리 영원히 찾아 헤매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만큼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별 있는 일]


그래, 갈 테면 가라, 그는 생각했다.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분별 있는 일]


삶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되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입으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선례도 생겨난다. 그래도 이 같은 사랑 싸움은 상당히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녀와 넬슨은 젊은 시절에 외로웠다. 이제 그들은 살아 있는 세계의 맛과 냄새를 원했으며, 지금까지는 서로에게 그것을 갈구했다. [해외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