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소설 쇼코의 미소 / 소설가란 의미 속에서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존재일까

2016. 7. 29.

'나에겐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의 세계,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현실을 부정하며 꿈을 좇는 사람의 세계다. 나는 후자의 세계를 지향하지만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경멸하는 전자의 세계에도 속할 수 없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부유하는 허황된 존재인 것만 같다.'


얼마 전 가까운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두서없이 삶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친구와 술자리가 있고 며칠이 지난 오늘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 소유의 생각이 나와 너무 같다고 느껴져서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소유의 20대 시절처럼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의미"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게 "두렵다."


나는 그애들이 자기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돈과 안정만 좇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의미였다. 나는 나의 꿈을 따라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두려웠다.



30대의 소유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라며 과거 영화감독을 꿈꾸던 20대의 자신을 부정한다. 그리고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한다.


결국 소유에게 의미 있는 꿈이란 계획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되었지만, 소설은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나는 소설 속에서 그 역설을 드러내는 장치가 (소설 제목에 나오는 쇼코가 아닌) 할아버지였다고 생각한다.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소유에게 할아버지는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닌,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영화감독을 꿈꾸며 좇던 의미가 빛을 잃는 와중에, 할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서 할아버지의 의미와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한다.


서로의 의미를 확인하기에 시간은 너무 짧았다. 소유가 서울에서 고향에 간지 예순다섯 날이 지나 할아버지가 죽는다. 그 뒤, 소유는 쇼코에게서 건네받은 이백 통 정도의 편지를 통해 할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할아버지의 꿈이 화가였다는 것, 사람의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데 흥미가 있었던 것, 딸과 함께했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 것, 자신을 자랑스러워 했던 것. 그리고 할아버지가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유일한 관객이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 *


30대의 소유는 꿈을 포기하고 삶의 의미를 잃은 것 같이 보이나, 실은 의미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20대 시절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면, 30대가 되어 할아버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으니 말이다.


최은영은 소설 속 주인공 소유와 여러모로 닮은 듯하다. 최은영은 [저자의 말]에서 종로 반디앤루니스 한국소설 코너에 서 있던 서른 살의 과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삶은 멀리 있었고, 점점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 이 년간 여러 공모전에 소설을 투고했지만 당선은 커녕 심사평에서도 거론되지 못했다. 그해 봄 애써서 썼던 [쇼코의 미소]도 한 공모전 예심에서 미끄러졌다."


[쇼코의 미소]가 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 소유가 영화감독을 포기한 것처럼 소설가의 꿈을 포기했을까? 의미 속에서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존재가 소설가라면, 그녀는 [쇼코의 미소]를 탈고한 순간 삶의 의미 속으로 한 걸음 내디딘,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소설가였다. 어쩌면 등단이니 수상이니 하는 수식은 최은영에게 소유가 꿈꾸었던 '영화감독' 같은 존재가 아닐까.


긴 머리를 높이 묶고, 노란색 슬리브리스 나염 원피스를 입은 쇼코.


제목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쇼코의 미소'는 저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어떤 위로일까.


사실 이 리뷰에서는 쇼코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쇼코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간다. "긴 머리를 높이 묶고, 노란색 슬리브리스 나염 원피스를 입은 쇼코"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