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만 읽는 낭만

2016. 7. 3.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을 처음 읽은 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수필집입니다. 기억하기로는 대학생 3학년 여름방학,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홍콩으로 배낭여행을 떠날 때, 틈틈이 읽을 요량으로 하루키의 수필집을 샀습니다.


홍콩에 볼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9박 10일 일정으로 비행기와 호스텔을 예약했는데, 3일 동안 웬만한 여행지를 둘러보고 난 뒤, 더는 관광할 게 없어서 깊은 심심함에 빠졌습니다(심란한 마음을 정리하자는 취지에는 맞았던 것 같은데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일 째 밤부터 묵기로 한 호스텔 결제에 오류가 있어서 예약이 안 된 겁니다. 급하게 새로 구한 침사추이 대로변 방은 좁은 데다가 환기도 안 되고, 더군다나 진드기가 있어서 고역을 치렀습니다(당연히 심란한 마음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앞서 밝혔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여행 중 심심할 때마다 틈틈이 읽을 요량으로 산 것인데,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다 읽어버려서 곤란했습니다(불행한 여행의 전조였을까요). 정확한 책 내용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분명 쉽고 재밌었습니다. 그 뒤로 하루키 (친분은 없지만 다들 이렇게 부르는 것 같으니, 저도 한 번. 확실히 편하네요.) 소설을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서점에서 첫 단락을 읽고 좀처럼 사고 싶은 마음에 불씨가 집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미루다, 최근 하루키의 수필집 (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에피소드가 유독 많아서 호기심을 자극했으나, 역시 그 뒤로 서점에서 하루키 소설을 집어 들고 내려놓기를 반복, 결국 다른 작가(세라 워터스)의 소설(핑거 스미스)을 샀죠(황홀한 마음으로 탐독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같은 국적의 작가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키친, 스위트히어애프터, 두 책 모두 첫 문단을 읽고 바로 구매)을 쉽게 집어 들었던 것과 비교하게 되는데요, 아마도 하루키의 가벼운 수필에 매료되었던 저는, 인터넷 서점 하루키 소설에 달린 꽤 진지하고 심오한 독자 서평을 읽고선 책 내용이 무거울 거라고, 덜컥 겁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뭐, 평생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는 것도 왠지 낭만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백영옥 소설가도 한 신문 칼럼에서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 쪽이 더 좋다"고 하니, 더욱 용기(?)가 납니다.


오로라는 이윽고 말이 꼬여서 의미를 잃어가듯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는 따뜻한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었다. /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본문 중


저는 그 뒤로 또 한 번 하루키 수필을 읽었습니다. 바로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입니다. 하루키가 여행했던 도시를 독특한 관점과 느긋한 서술로 훑는데, 마치 무심코 틀어 둔 TV를 계속해서 보듯, 딱히 이거다! 싶은 부분은 많지 않지만, 계속해서 읽게 되는 '하루키식' 매력이 있는 수필집입니다. 책 중간중간 여행 사진이 수록되었는데, 그 양이 일반적으로 봐 온 여행 수필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어서,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기보다, 오히려 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랄까, 여행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이 어땠는지 설명할 때 꼭 사진첩을 보여주곤 하는데, 사진 없이 말이나 글로도 충분히, 어쩌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전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뭐, 하루키라서 가능한 것일지 모릅니다만). 사진에 의존하지 않도록 단련한다면, 마치 하루키가 그렇듯, 여행지에 대한 감상도 더욱 풍성해질 수 있겠습니다.


갑자기 어투가 바뀌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말씀해 주신 부분인데, 하루키가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랍니다. 다른 챕터에도 그런 부분이 꽤 있습니다. / 문학동네 페이스북 계정 답변


얘기 안 하고 리뷰를 마칠 수 없는 건, 바로 경어체와 평어체가 섞인 부분입니다. 처음엔 '오호, 책 오류 발견!'이란 마음에 사진까지 찍어서 출판사 페이스북 계정 메시지로 제보했지만, 읽다 보니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혹시, 작가가 의도한 것인가?' 곧 답장이 왔는데(금요일 늦은 밤에도 기꺼이 답장해주신 계정 관리자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작가가 의도한 거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불편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적재적소에 경어체를 넣어 글에 리듬감을 준다랄까. 세계적인 작가의 클래스랄까. 뭐 그런 게 느껴졌습니다만, 여전히 의도는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