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출판 바이디자인 리뷰

2014. 11. 11.


종이사전의 몰락

사람들은 이제 종이사전을 사지 않는다. 기술이 발전해 전자사전이 등장하며 종이사전을 대체하는가 싶더니 스마트폰이 나와 실시간 인터넷 사전으로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사용자가 직접 집필하는 위키피디아는 몇 사람이 모여앉아 집필하는 종이사전이 쫓을 수 없는 속도와 양이다. 질에서도 다양한 전문가가 위키피디아에 글을 쓰고 수정과 토론과정을 거치므로 종이사전과 비교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영화 ‘행복한 사전’

올해 2월 개봉한 영화 ‘행복한 사전’은 종이사전 생명의 끝자락이었던 90년대를 배경으로 종이사전 ‘대도해’를 집필하며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주인공 류헤이의 이야기다. 단어를 하나하나 수집하며 그 본질을 헤아리며 세상을 성숙하게 바라보는 과정을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담아내 느낀 게 많은 영화였다. 첨단 시대에 종이사전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지만 얇고 끈적한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본뜻을 헤아리는 그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디자인 종이사전

홍시에서 출판한 ‘바이 디자인(By Design)'은 '디자인 사전(Design Dictionary)'으로 이름 짓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 제목이 본문의 내용을 더 직관적이고 충실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원서 제목인 ’B is for Bauhaus'도 힘이 부족해 보인다. 아무튼, ‘바이 디자인’은 사전 형식으로 알파벳 A부터 Z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디자인 키워드와 해박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객관적이기 않은 다분히 주관적인 사전이다. 그래야 종이사전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 저자 데얀 서직(Deyan Sudjic)은 건축 디자인 잡지 ‘도무스(Domus)'의 편집장을 거쳐 런던디자인뮤지엄 관장으로 활동하는 건축디자인계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니 이 주관적인 디자인 사전의 가치를 한껏 높였다.

한국어판 책 또한 기획의도에 맞게 사전을 빼닮았다. 두꺼운 사전 속 끈적한 반투명 유백색 종이를 넘길 때의 감성을 640쪽 분량과 튼튼한 반 양장본, 118*188㎜ 판형에 담았다. 한국어판을 속 표제면 디자인을 키워드 중심으로 새롭게 바꿨고 일러스트는 새로 추가했다고. 완성도 높은 책을 위해 애쓴 흔적은 책을 소장하는 독자를 기분 좋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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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출판 바이디자인 리뷰

얼마 전 읽은 디자인 평론가 앨리스 로스손의 ‘헬로 월드’(안그라픽스 출판)와 굉장히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13가지 주제로 오늘날 디자인의 맥을 짚은 ‘헬로 월드’와 달리 호흡이 짧은 키워드 중심이라 그런지 ‘바이 디자인’이 더 세련되게 느껴진다. 디자인의 시야를 넓혀주지만 접하기 어려운 디자인 관련 에피소드가 풍부하다. 선거운동 당시의 오바마와 스타벅스가 같은 서체를 사용했지만, 오바마는 성공적이었던 반면 스타벅스는 실패했던 것(A is for Authentic), 14년 짧은 역사의 바우하우스가 오늘날까지 전설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3가지 이유, 그리고 그 전설은 다소 포장된 것이라는 관점(B is for Bauhaus), 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을 뒤엎을 수 없는 얄팍한 포스트모더니즘(P is for Post-modernism)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구 반대편 한국 독자의 가슴에 감동을 남기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

‘헬로 월드’를 읽고 나면 오늘날 디자인의 미션이 무엇이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이 생긴다면 ‘바이 디자인’을 읽고 나면 디자인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관점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 ‘행복한 사전’에서 류헤이가 대도해 사전을 통해 삶의 관점을 확 넓힌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