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24일 리뷰/여행
마이어 파트너스의 백색 건축
마이어 파트너스의 건축은 백색 건축이란 한 마디로 규정된다. 백색 건축, 단어 뜻만 놓고 본다면 아주 심플하지만 그 깊이를 가늠하자면 아득하다. 일본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백색’을 두고 무언가를 규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여백의 태도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 의미를 마이어 파트너스의 ‘백색 건축’에 연장해 생각해 본다면 형태와 기능을 규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건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기반을 둔 건축 사무소임에도 ‘공간 空間’을 빈 여백으로 표현하는 동양 문화에 더 잘 스며든다고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한편 재료와 색상을 극도로 제한하는 백색 건축은 오직 구조적 조형미와 사용자의 체험만으로 의도를 전달해야 하므로 난이도가 높다.
씨마크와 솔올 사이의 변화
마이어 파트너스의 건축물 답사는 이번, 2024년 개관한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답사는 역시 강릉에 2015년 지어진 씨마크호텔이었다. 서울에서 긴 일직선을 그리며 닿은 강릉의 동해 바다에서 나선 호를 그리며 물 흐르듯 객실까지 빨려 들어 갔던 당시의 경험은 아직까지 손 꼽히는 건축 체험이다. 씨마크와 솔올 사이, 마이어 파트너스는에 큰 변화가 있었다. 건축 사무소의 대표였던 리차드 마이어가 2018년 직원 성추행 혐의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은퇴했다. 사무소의 이름은 ‘리처드 마이어 & 파트너스 아키텍츠’에서 ‘마이어 파트너스’로 변경되었고, 기존 프리츠커 수상 스타 건축가 체제에서 연덕호 리드 디자이너와 조지 H. 밀러 COO 중심의 협업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랜드마크에서 맥락 기반 건축으로
스터디를 위해 챗GPT에 질문한 결과, ‘마이어 파트너스’의 리더십이 재편된 이후는 과거 문화시설 중심의 권위적인 건축 중심에서 주거, 교육, 공공시설, 도시 마스터플랜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건축으로 외연을 확장했으며, 백색 건축의 개념은 기념비적 랜드마크 건축에서 공공성을 강조한 맥락 기반 건축으로 확대 전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씨마크호텔은 하나의 조각 작품과 같은 조형성이 두드러진 반면, 솔올 미술관은 넓게 펼쳐진 대지와 맞닿아 상호작용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이번 방문 당시 솔올미술관의 입구를 제외한 외부 통로는 일절 통제되어 건축가가 의도를 더 깊이 경험하지 못한것만 같아 아쉬웠다. 자세한 답사기는 아래 사진과 함께 남긴다.
곧게 뻗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이 긴 직선의 이동 경험은 추후 솔올 미술관에서의
건축적 경험과 맞물리며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된다.
평창 인터컨티넨탈 알펜시아에서 출발해
30분 정도 걸려, 강릉 톨게이트를 지났다.
강릉 시내의 신축 아파트 단지를 지나며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나 싶었지만,
미술관 진입로로 접어 드니 푸르른 녹음과
그 사이 우뚝 선 백색건축이 맞이한다.
주차장에서 미술관으로 진입하려면
엘리베이터 & 계단실로 향해야 하는데,
그 너머로 강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의 건축을 마주하기 전
강릉 시내 일대를 시원하게 보여준 것은 아마,
지역 맥락에 기반을 둔 건축 설계 때문일 것이다.
건축물을 더 깊이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실을 이용해
강릉시립미술관 솔올로 향한다.
계단을 올라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강릉시립미술관 솔올 백색 건축을 마주한다.
주차장에서 미술관으로 곧장 오르는 방법을 두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의도적으로 멀리 둔 것은,
멀리서 미술관 일대의 자연 환경과 함께 미술관의
건축물을 충분히 감상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가만히 서서 주출입구 입면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같은 건축
사무소에서 지은 강릉 씨마크호텔과 비교해 첫인상을 살펴본다.
씨마크호텔이 조형적이고 기념비적인 랜드마크 건축이었다면,
솔올미술관은 지역의 맥락에 뿌리내린 수평적인 첫인상을 준다.
건축물은 전반적으로 띄워져 있는 느낌인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 주출입구의 지붕은
선박의 앞머리처럼 들쳐 올려진 형상이다.
물 위에 띄워진(floating) 느낌이기도 하고,
건축물 사이가 띄워진(separating) 느낌이기도 하다.
뒤에서 좀 더 느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출입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선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안뜰 정원의 풍경이 차경으로 한 눈 가득 들어온다.
그리고 들어섰을 때 기준, 왼쪽으로는 카페가 있다.
전반적으로 비워진 느낌이 많다.
강릉시립미술관 전시 MD상품들을 판매할 수 있는
공간들로 기획됐으나 현재 준비가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카페어서 커피와 라떼를 마셨는데,
지역 특색을 살린 몇 가지 메뉴도 갖추었다.
(TMI: GBH 트레이는 손잡이 부분이 많이 낮게 설계되어서
테이블 위에 있는 트레이를 양손으로 집기 많이 불편하더라)
카페 맞은 편에는 티켓 카운터가 있다.
강릉시 7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티켓카운터 너머로 1층 전시장과 EV실, 계단실이 있다.
참고로 전시는 사진 촬영이 제한되어서 찍지 않았다.
입구에서 잠시 설명한 '띄워진' 건축 컨셉트는
계단실에서도 보이는데, 이 계단 벽과 떨어진 채
1층과 2층을 공중에 뜬 채 가볍게 연결한다.
가볍게 띄워진 계단을 오르며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 양옆 모서리에
사진 상에 보이듯이 아주 얇은 금속 관이
바닥에서부터 아주 높은 천장까이 이어져 있다.
2층에 올라서 찍은 사진에서 보이듯
아주 얇은 기둥 2개가 계단참을 지지하고 있다.
아마 가볍게 띄워진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계단을 지탱하는 구조체를 천장에 고정한 듯하다.
2층 한켠에는 큐브형태로 튀어나온 조망공간이 있다.
1층에서 보았을 때 가보고 싶었던 독특한 공간이다.
이렇게 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큐브 형태의 공간을
해외 유명 미술관(MoMA), 공연장 등에서 봤던 것 같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 리뷰를 몇 몇 찾아보니,
이 카페 공간이 공연장으로도 쓰이는 듯하고,
중앙홀에 설치 조각 작품이 설치되기도 하여
이 공간에서 작품과 공연을 감상하기 좋을 것 같다.
건축물은 야외로 연결된 통로가 정말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주출입구를 제외한 모든 문은 폐쇄됐다.
문 뿐만 아니라 테라스도 모두 폐쇄되었다.
(사진은 유리창 너머로 찍은 것)
산책로를 이용하려면 주출입구로 나가라 안내되었다.
건축이 외부 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었기에
이를 체험하러 온 필자로서는 상당히 아쉬웠다.
건축물을 좀 더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어서
산책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처음 마주한 것은
건축물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연출된
수변 공간이었고, 이는 안뜰까지 이어졌다.
수변 공간 너머로 안뜰과 건축물이 보인다.
안뜰에는 몇 가지 조각 작품이 설치되었다.
마이어 파트너스 연덕호 건축가의 인터뷰를 보니,
강릉시립미술관은 한옥의 건축 개념을 가져왔고 한다.
마치 한옥 마당처럼 3개의 매스가 마당(안뜰)을
'ㄷ' 형태로 감싸도록 설계된 것을 알 수 있다.
건축물이 유난히 대지에 뿌리 내리듯 보이는 것은
이 길게 뻗은 램프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 덕분에 맥락(context)에 기반에 둔
건축 설계 콘셉트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램프의 끝자락을 마주하면
바닥으로부터 가볍게 들어올려진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마치 큰 배 한척을 보는 느낌을 준다.
강릉시립미술관 뒤 낮은 산을 따라
'나무안녕길'이라는 시립 공원이 자리한다.
이 데크 길을 따라 걸으며 건축물을 좀 더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 이라는 미술관 이름은
마이어 파트너스 연덕호 건축가가 지은 이름이라 한다.
과거 씨마크호텔 설계 당시 강릉을 찾았을 때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 유난히 강인하고 아름다운 소나무에
매료되었고 이번 미술관을 지으며 '소나무가 많은 고을'이란
옛 지명을 이름으로 가져와 제안했다고 한다.
나무안녕길 언덕에 오르면
강릉시내 신축 롯데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은 나무에 가려지고,
멀리 보이는 산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대지에 뿌리 내리듯 백색 건축을 뽐내고 있다.
다시 안뜰로 내려와 건축물 이곳저곳을 살펴 본다.
안뜰 중앙에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가 심어졌다.
별도 안내가 없어, 챗GPT에 왜 배롱나무인지 물어 보니
배롱나무의 강인함과 긴 개화 시기의 특성은, 바닷바람과
사계절이 뚜렷한 강릉의 기후와 잘 맞는다고 한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램프를 걸어 올라가보기 위해 램프로 향한다.
램프구간 옆으로 필로티 공간이 있다.
해당 공간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육중한
건축물이 가느다란 기둥에 지탱되고 있다니 ...
굉장히 가볍고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의 건축물은
바닥에서 가볍게 띄워져 있는 동시에 건물
사이가 좁은 간격을 두고 띄워져 있어다.
그래서 그 사이 공간으로 강릉의 파란 하늘이
백색 건축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펼쳐지며,
빛과 그림자가 건축물의 인상을 시시각각 바꾼다.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관람객도
중간중간 쉬어가며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평지 구간을 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2층에 다다르면 지붕이 가볍게 띄워진 느낌으로
캔틸래버 구조로 길게 뻗어져 나와 있다.
띄워지고 띄워져서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고,
금방이라도 경적을 울리고 날아갈 것 같만 같았다.
건축 산책을 오래 기다려 준데다가
싫은 내색 없이 손 흔들어주는 아내가 고맙다.
안뜰과 2층 전시장 복도를 잇는 계단도
벽과 바닥에 떨어져 공중에 떠있듯이,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설계했다.
강릉시립미술관 솔올 관계자님...
인력의 문제일까요? 관리의 문제일까요?
이곳의 모든 문은 개방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방문했을 땐 꼭 여러 통로를 통해 건축물의
외부와 내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지난 씨마크호텔에 이어 두 번째로 감상한
마이어 파트너스의 건축 공간.
10년의 시간 사이에 건축 사무소에도 변화가,
나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울과 인천에 롯데빌라스 건축 설계를
마이어 파트너스에서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 10년 뒤 경험할 마이어 파트너스는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마주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