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9.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13 《레이먼드 카버》를 읽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작가에 대해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레이먼드 카버 전기인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을 번역한 고영범 작가가 쓴 책이다. 작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전기를 읽을까 생각했지만, 960쪽에 달하는 긴 분량을 즐겁게 읽을 자신이 없었다. 레이먼드 카버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에게는 전기보다는 안내서가 필요했다. 이 책의 내용은 카버가 삶을 영위해온 공간을 시간 순서대로 지은이가 답사하는 구성으로 짜여 있어서 지은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 것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더욱이 레이먼드 카버의 주요 작품에 대한 지은이의 통찰력 있는 해설이 곁들여져 있어서 《대성당》을 읽으며 들었던 궁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대성당》을 읽고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이유는, 작품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문은 ‘윤리적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책에는 인종 차별적인 내용이 다수 있어서 독자로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레이먼드 카버는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걸까? 두 번째 의문은 ‘작품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내가 글의 맥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사건들이 몇 있는데, 그 사건들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레이먼드 카버》 책 후반부에는 ‘레이먼드 카버 문학의 키워드’ 9가지(자연, 가족, 가난, 메리언과 갤러거, 술, 고든 리시, 더러운 리얼리즘, 작은 잡지, 아메리칸 체호프)가 실렸는데, 그중 나의 두 가지 의문과 관련된 키워드는 ‘가난’과 ‘고든 리시’였다.
첫 번째 키워드, 가난. 레이먼드 카버는 살아가는 동안 대부분 가난했다. 미국 서부 시골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으며 글쓰기 공부와 일을 병행하느라 가난을 벗어날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글쓰기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수입을 얻기도 했으니 글쓰기는 그가 돈을 벌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동이었다. 창작 시간이 부족했던 그의 작품에는 자연스럽게 그가 일상에서 겪고 생각한 것들이 여과 없이 쓰였을 것이다. 이렇게 쓰인 그의 문장들은 후에 ‘더러운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며 레이먼드 카버만의 독특한 색깔이 되었고,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학의 한 흐름으로 인정받는다. 한편, 가난으로 인해 그는 윤리적 글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작품에서 유색인을 두고 ‘깜둥이(Negro)’라 쓰며 적대적인 존재로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는 그 지점에서 책을 읽을 때면 잠시 독서를 멈추게 되었다. 21세기에 책을 읽는 독자와 20세기 중반에 글을 쓴 작가의 윤리 감수성의 차이쯤으로 여기고 넘겨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그는 윤리 의식이 결여된 작가로 멀리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던 것이다. 이 점은 《레이먼드 카버》에서 저자가 명쾌하게 해설하고 있고 나는 공감했다. 레이먼드 카버가 인종 차별적인 생각을 여과 없이 작품에 드러낸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가 적대감에서 공감, 연대감으로 변화하며, 레이먼드 카버는 윤리적 작가로 성장했다. (공감과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대성당》에 수록된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다.)
두 번째 키워드, 고든 리시. 고든 리시는 작은 잡지를 전전하던 레이먼드 카버를 중앙 문단으로 이끈 편집자였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 세 편 모두 그가 편집했다. ‘캡틴 픽션’이라 불리던 그는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편집자로 유명했는데, 카버의 두 번째 작품집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는 내용의 40퍼센트가량을 드러내고 일부는 결말을 바꾸기도 했다. 당시 고든 리시가 제안한 편집을 대부분 받아들인 레이먼드 카버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그를 신뢰했고, 한편으론 감사히 생각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고든 리시는 왜 40퍼센트가량을 드러내고자 했는지가 궁금했다. 이것이 내가 《대성당》을 읽고 들었던 두 번째 의문, 맥락에서 벗어났다고 여긴 사건들이 쓰인 배경에 대한 단서일 것이라 추측했다.
고든 리시의 편집을 받아들이고 책을 출간한 지 2년 뒤 《대성당》을 출간할 때, 레이먼드 카버는 고든 리시의 적극적인 편집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 2년 사이에 레이먼드 카버는 부인과 이혼하고, 문학 스승이자 인생의 멘토였던 존 가드너가 사망하는 일을 겪는데, 고든 리시의 편집을 거부한 것이 이 일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의도를 관철한 《대성당》을 출간하고 큰 성공을 거둔다. 나는 《대성당》에서 맥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사건들을 읽으며,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작품을 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쩌면 고든 리시가 덜어내지 못한 그 지점들이 내가 의문을 품었던 작품 속 사건들이고, 그 사건은 독자가 아닌 저자 자신을 위해 쓰인 것일지 모른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든 리시가 편집했다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수록된 작품을 읽으며 맥락에 벗어났다고 느끼는 사건이 없어야 한다. (어쩌면 나는 고든 리시가 편집자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한 작품이 더 좋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으로는 《대성당》을 그의 삶과 함께 놓고 다시 읽었을 때, 맥락에서 벗어났다고 느꼈던 사건들이 그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 위로가 됐든, 이해가 됐든, 단념이 됐든, 그가 글을 쓸 당시에 필요로했던, 그래서 작품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 나는 시간을 두고 두 소설집을 읽으며 레이먼드 카버의 세계에 대해 더 알아가려고 한다. 《대성당》을 읽는데 마음을 너무 많이 써서, 당분간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읽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