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3.
사랑은 하면 할수록 쉬워야 하는데 더 어렵다. 처음엔 감정의 이름도 모른 채 사랑에 흠뻑 빠져들지만, 횟수를 더하다 보면 사랑이 뭔지 모호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경계를 누가 확신할 수 있으며, 사랑과 집착의 경계는 누가 가려낼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소설 <캐롤>은 첫눈에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테레즈와 캐롤의 동성 간 사랑을 다루지만, 둘의 사랑이 너무나 확실하고 위대해서 동성애 논쟁은 부질없게 느껴진다. 이토록 간절하고 보편적인 로맨스는 이전에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둘의 로맨스가 더욱 아름다운 건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지켜낸 사랑이기 때문이다. 딸을 볼모로 잡힌 법정에서 무모하리만큼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캐롤의 용기와 숱한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지켜낸 테레즈의 확신 앞에서, 자존감을 위해 서로의 감정을 갈취하는 종류의 사랑은 허무하고 역겹기만 하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초창기 작품임에도 작가로서의 생명을 염려하여 가명으로 소설을 출간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그 후 서스펜스 작가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뒤 40년이 지나서야 쓴 저자 후기. 다작으로 유명하다는 인기 작가의 유일한 연애 소설이자 해피 엔딩. 이 모든 것이 테레즈와 캐롤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한다.
상처를 몰라 사랑이 두렵지 않던 그때, 열병같이 시달리는 감정을 애써 숨기지 못하던 그때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을 발견하고 손을 힘껏 흔드는 캐롤을 향해 걸어가는 테레즈의 마지막 장면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선하다. 둘의 사랑은 소설이 끝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사랑에 내가 있고 나의 사랑엔 그들이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