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6.
2년 전 원룸에서 투룸으로 집을 이사했을 때 벽이 허전하게 느껴져 액자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원하는 액자를 찾지 못했다. 액자를 찾지 못했다기보다 원하는 액자가 무엇인지 몰랐다. 약 1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고민한 끝에 비롯에라는 액자판매 쇼핑몰을 알게 되었고 그중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한 빌라사보아가 입면 그림을 구매했다. 우선 현대 주택의 표준을 제시한 건축 작품으로써 의미가 있었고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던 시절 동경했던 건축물이기도 했다. 이렇듯 나는 액자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얼마전 새로 꾸민 방에도 액자를 달고 싶었다. 이번에도 의미 있는 액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액자는 없었으며(이전에 산 빌라사보아 액자도 그랬다) 의미부여를 위한 의미부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자나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상태가 꽤 괜찮은 액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액자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내가 마음에 드는 '예쁜 사진'을 엄선했다. 포토몬이라는 온라인 프린팅 사이트에 장바구니에 넣어 놓았다.
그날이 금요일이나 어차피 주말배송이 안 되어서, 결제를 차주로 미루었다. 그 '예쁜 사진'은 지난 호시노야 교토에 머물었던 미즈노네 객실을 문 밖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가 사진을 보면 여행지에서 객실에 들어설 때의 설렘과 오모테나시가 떠올랐다. 주말을 지나며 다른 사진을 뽑길 원했다. 바로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한 달간 여행했던 미국 동부에서 찍었던 필립 존슨의 글라스하우스 사진이었다. 이 글라스하우스 사진은 호시노야 교토의 사진보다 모든 면에서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는 의미라는 측면 하나만큼은 더했다. 결정에 영향을 준 것은 주말에 읽기 시작한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 <슈독>이었다. 세기말에 태어난 나는 '스포츠 브랜드 = 나이키'라는 등식이 자연스러웠으나 20세기 중반, 당시 독보적인 스포츠 브랜드였던 독일 아디다스의 독주에 맞서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를 미국 시장에 수입하겠다는 필 나이트의 '미친 생각'에서 시작된 나이키의 창업기는 나의 예상과 전혀 달리 고난하고 처절했다. 최근 집어 든 어떤 소설보다 빠져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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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 33살을 맞이했다. 나는 아직 100% 안정감을 갖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지만 10년전에 비하면 100%를 향해 성큼 다가가 있다. 과거보다 많이 갖춘 만큼 지켜야 할 게 많아진 인생이다. 지켜야 할 게 많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을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켜야 할 것들이 다소 벅차게 느껴질 때면 나는 무언가에 푹 빠져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던, '미친 생각'으로 가득했던 20대 초반의 나를 가끔 그리워한다. 그 미친 생각을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게 글라스하우스 담 넘어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의 무모함은 이렇다. 미국 동부를 여행하며 건축물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을 품고 아무 계획 없이 한 달 일정으로 뉴욕-인천 왕복 비행기 티겟을 구매했다. 그리고 발 닫는 대로 미국 동부를 걸었다. 그중 가장 무모했던 목적지가 뉴케이넌에 위치한 글라스하우스였다. 근대유산으로 지정되어 예약자만 방문할 수 있었는데 그걸 알아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찾아갔다. 구글맵 상의 글라스하우스 위치는 글라스하우스 예약 티켓판매처였다. 당시 글라스하우스는 일시 폐쇄되었다. 그냥 돌아갈 수 없어 인도 없는 도로를 1시간 걸어 글라스하우스를 찾아갔다.
도로를 따라난 담장 너머로 글라스하우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뛰었다. 나는 당시 들고 있던 삼성 케녹스 카메라를 오토줌하여 글라스하우스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애썼다. 그때 글라스하우스 진입로의 주택 2층 창문으로 누군가 나를 향해 고함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말하는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사진 찍지 말고 돌아가라는 말인 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1시간을 걸어 뉴케이넌 역 옆 스타벅스에서 몸을 잠시 녹이고 뉴욕 펜스테이션 행 열차에 몸을 맡겼다. 여행 막바지였던 그때 나는 돈이 바닥났고 많이 외로웠으며 우울했다.
지금의 나였다면 방문 가능한 일정에 예약하고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편안하게 건축물을 답사한 뒤 편안한 호텔에서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의 나로썬 그때의 내가 어리석고 무모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때의 내가 가졌던 미친 생각은 사라지고 없다. 앞으로 인생을 살며 다시 한번 무언가에 한 없이 열정을 쏟아부을 미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 액자는 그러한 물음을 매일 상기시키며 나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길 희망한다. 사진은 포토몬 대형출력 서비스로 주문해 택배로 받았다. 월요일 아침에 결제하고 목요일 오후에 받았다. 사진과 함께 내용을 덧붙인다.
-참고 글: 빌라사보아 액자 구매기
-참고 글: 뉴케이넌 글라스하우스 방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