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저지대] / 가족을 향한 믿음은 어디에 뿌리내렸나,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길티플레져

2017. 5. 1.

오래간만의 게시물이니 근황인 고양이를 먼저 소개합니다. 두 달 전쯤 성묘 남자 두 살인 다나를 분양받았다. 다나의 주인은 어린 두 자녀를 양육하는 주부였는데, 다나가 아기를 괴롭혀서 더는 기르기 힘들었다고 했다. "말썽꾸러기라 걱정이에요." 라는 전주인의 말을 넘겨짚었는데 정말 말썽을 많이 피운다. 게다가 덩치도 크다. 성묘 남자라 경계가 심해서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린다. 두 달이 다 된 지금에서야 쓰다듬을 수 있는 정도. 발톱을 깎이고 싶은데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여러모로 첫 고양이로서 부담이 큰데 어쩌겠나, 긴 시간을 두고 노력하겠습니다, 다나 님.


다나(2) 고양이종종 멍한 상태다


긴 연휴가 시작됐다. 친구와 저녁을 먹은 시간 빼고 집에만 있었다. 연휴가 좋은 건 밤이 늦도록 스트레스 없이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일어나서 또 보고, 먹고 싶은 걸 배달 주문해 먹고 잠 올 때 잘 수 있는 것. 오늘 다나가 밥 달라는 울음소리에 아침 늦게 일어나서 참치 반 캔을 따주고 거울을 봤더니 이런 폐인이 있나. 보통 주말 이틀을 보내고 나면 출근 시간이어서 이런 막장까진 아닌데, 삼 일째 주말 아침은 정말 스스로가 봐주기도 힘들다.


이틀을 침대에서 보냈더니 대청소할 마음이 생겼다. 다나와 함께 지내며 매일 쓸고 닦긴 하지만, 이제 여름도 다가오겠다 선풍기와 에어컨을 분리해 청소했다. 겨울 이불과 코트도 세탁하고 얇은 이불에 마 소재의 이불 커버를 씌웠다. 서랍의 짐들을 모두 꺼내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청소하는 내내 다나가 귀찮게 쫓아다니는 게 귀여웠다. 사흘 간 묵은 때를 따뜻한 물에 불려 시원하게 씻었다. 오늘 실내를 비추는 햇살이 뜨거웠는데 씻고 나와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으니 천국 같았다.


영화 [분노] 스틸컷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배달 햄버거를 시켜 먹으며 영화 [분노]를 봤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물인데 긴장감에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몰입했다. 영화는 성형수술을 하며 도피생활 하는 살인자로 세 명의 용의자를 그린다. 셋 중 누가 범인일까 추리하게 되는데, 한편으론 범인이 아니리라 믿다가도 다른 한편 의심하게 된다. 감독이 의도한 바겠지만, 줄곧 믿었던 용의자가 범인이 되는데, 믿었던 만큼 더욱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한편, 범인일 것 같던 인물이 무고함이 밝혀지는 순간에는 의심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절감했다.


최근에 저지대를 읽고 압도당해서 엄청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리뷰를 블로그에 남기고 싶었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 할 지 막막했다. 책을 읽는 중 감명 깊은 구절을 필사하는 습관이 있는데, 중반부까지 적었던 필사노트가 사라져서 내가 느낀 감정들도 사라진 것 같았다. 스트레스 받으며 리뷰를 적고 싶진 않아 미루다가 [분노]를 보고 나서 [저지대]에 대해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줌파 라히리 [저지대] 표지 │ 마음산책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는 3대의 이야기를 다룬 긴 소설이다. 처음엔 책장을 빠르게 넘겼지만, 절반 뒤부터는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아 완독까지 한 달 가까이 끌었다. [저지대]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20세기 중반 인도 캘커타의 중산층에서 태어난 서로 다른 성격의 두 형제의 일대기를 그린다. 동생인 우다얀은 열정적인 인물로 노동 혁명을 위해 삶을 바치지만, 그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사형당한다. 형인 수바시는 우다얀과 달리 소극적 인물로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찾아 미국에서 유학한다. 수바시는 죽은 동생의 아기를 임신 중이던 가우리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떠나 그녀의 양육과 생활을 돕는다.


미국으로 도피할 때만 해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수바시와 가우리는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가우리는 어느 한 곳에 묶이지 않는, 주체할 수 없이 자유로운 여성이다. 억압받던 인도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 가우리는 딸을 수바시에게 맡기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다. 나는 소설에서 누구보다도 가우리에게 이끌렸다. 전 남편의 자식인 딸과 자신에게 기회를 안겨준 한때 아주버님이었던 남편 수바시를 버리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가족을 저버리는 죄스런 자유로움, 일종의 길티플레져(Guilty Pleasure)에 묘하게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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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믿음이 강요되는, 믿음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사회다. 친구보다 가족끼리 더 다투는 것도 서로 믿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분노]에서 의심 없이 믿었던 사람의 악행을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연휴 첫날이었던 지난 토요일 대학 동기와 저녁을 먹은 후에 후배와 술을 마셨는데, 두 자리에서 모두 가족 얘기를 많이 했다. 나와 같이 편부모 가정에 자란 동기는 얼마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남은 가족들 간의 다툼을 이야기했고, 후배는 어릴 적 트라우마를 얘기하며 부모님을 미워했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받는 소속감에 대한 불편함으로 대화를 이었다. 


가족이니까 당연한 것들. 평생 이어져야 하는 관심과 연락, 당연히 주고받아야 하는 사랑. 그런 당연함이 불편한 한편, 결국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인 건 아이러니다. 우다얀과 가우리가 낳고 수바시가 키운 딸 벨라는 어릴 적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고 분노한다. 반면, 벨라는 아버지라고 믿었던 수바시가 사형당한 아버지의 형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수바시에게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끈끈한 결속력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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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서사도 좋았지만, 소설이 더욱 뛰어나다고 느낀 건 긴 서사의 파편들을 아주 감각적이고 세련되게 콜라주한 저자의 실력이다. 자신이 딸과 함께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준 수바시와 딸을 버리고 떠나는 가우리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녀의 행동과 생각을 아주 세세하고 깊은 곳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 저자의 문체에 있다. 소설을 한 권 한 권 읽다 보면, 편견을 갖고 누군가를 내가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깨닫는다. 편견은 의심이 아닌 믿음이다. 믿음은 깨지면 용서가 안 된다.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 순 없지만, 믿을 것은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게 가족이든 고양이든 뭐든 간에 하나로 충분하다.



책 속 밑줄


거의 5년 전에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녀와 함께 어딘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감행한 일의 결과에 자신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을 어떤 곳에 이르기를 기다렸다.


그는 벨라를 진정시키고 벨라의 충격을 가라앉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두 팔로 그를 안으며 위로해준 사람은 오히려 벨라였다. 벨라의 날씬하고 튼튼한 몸에서 불안감이 스며 나왔다. 벨라가 그를 꼭 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빠가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가우리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벨라의 상태와, 가우리가 집을 나간 것이 벨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고 있는지를 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다. 당신은 아이를 내게 맡기고 떠나더니 아이마저 떠나가게 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섰다. 자신에게 신선한 삶이 주어지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벨라와 수비사로부터 떼어 놓는 데 걸친 세 시간이 여기로 날아오는 동안 보았던 산맥들 만큼이나 크고 견고한 물리적 장벽 같았다.


고립은 자체적인 형태의 교제를 제공했다. 자신의 방의 믿음직한 고요, 저녁의 변함없는 정적,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게 될 것이며, 어떤 방해도, 어떤 뜻밖의 일도 없을 것이라는 약속 등이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