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한국 미술 거장인 박서보 작가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2년 전 연희동 박서보 재단 '기지'에서 도슨트 투어를 했다. (박서보 재단 방문 후기 링크) 당시 관계자의 배려로 아내와 나, 단둘이 투어를 진행한 덕분에 반복적인 붓질 속에 자신을 비워내는 작가의 수행적 작업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박서보 재단 기지 옆 부지에서 한창 건설 중이던 미술관을 보며 '완공되면 꼭 다시 오자'며 아내와 약속했다. 그리고 2026년 8월 박서보 미술관이 개관했고 아내와 함께 방문했다.
최문규 건축 설계 감상
박서보 미술관은 최문규 건축가가 설계했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박서보 재단 건물인 '기지'와 신축 박서보 미술관의 연결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조병수 건축가가 지은 '기지'가 생전 작가의 창작과 삶이라는 에너지를 담아냈다면, 최문규 건축가의 미술관은 사후의 비움과 추모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서보 재단을 건축한 조병수 건축가가 빛과 그림자로 작가의 '묘법'을 은유했다면, 박서보 미술관을 건축한 최문규 건축가는 절제와 비움으로 작가를 추모하고,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는 절제된 마감재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박서보 미술관 개관전
이번 개관전은 박서보 작가와 흐엉 도딘 작가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박서보 작가가 한지를 긁어내고 파내며 자아를 던져버렸다면, 흐엉 도딘 작가는 안료를 겹겹이 쌓아 올렸다. 기법은 서로 달랐지만, 오랜 시간을 견디며 작품을 완성해낸 장인 정신은 닮아 있었다. 예술가에게 시간이란 결국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조금씩 내어주는 고귀한 과정이다. 삶 전체를 바쳐 '비움'과 '수행'을 표현하고자 했던 두 거장의 집요한 예술 혼과 화폭에 켜켜이 쌓인 숭고한 시간의 울림은 가슴 깊이 진한 감동을 주었다.
전시 관람 동선과 감상
지하 1층 주차장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와 발권한 후 안내를 따라 지하 2층, 지상 2층, 지상 3층 순으로 전시를 감상했다. 지하 2층은 선큰가든에서 흘러드는 은은한 자연광이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자연스레 작품 세계로 빠르게 몰입할 수 있었고, 지상 2층은 빛을 차단한 블랙박스 공간으로 박서보 작가의 깊은 작품성을 탐구하기 좋았다. 지상 3층은 유글라스를 통과한 밝은 빛이 시각적 쾌감을 주며 관람의 마무리를 가볍게 환기해주었다. 전반적으로 완성도 높은 전시 덕분에 기분 좋게 관람을 마쳤으나, 엘리베이터 중심 동선이 1층 티켓팅 및 주차장 이용객과 계속 겹쳐 흐름이 끊긴 점과 계단실 활용 부족은 아쉬웠다.
이번 방문의 의미
이번 관람은 쌍둥이 출산 후 육아에 지쳐 있던 아내와 오랜만에 함께한 소중한 데이트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2년 전 단둘이 '기지'를 거닐었던 추억이 스쳐 지나가며 아련한 시간의 무상함을 느꼈다. 아내와 손을 잡고 작품을 둘러보며 삶의 가치와 서로의 존재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2년 뒤 연희동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있기에 이번 나들이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예술과 삶이 조화롭게 숨 쉬는 연희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애정이 한층 아늑하고 깊어졌다. 자세한 관람 후기는 아래 사진과 함께 남긴다.

연희동 주택가 뒷골목에 들어선
박서보재단과 박서보미술관은
골목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

몇 해의 시간 차를 두고 각기 다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건축임에도 큰 틀에서 연결성을
가지면서도 각 건축물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맞은편 주택가와 골목길을 두고 들어선 미술관
화단, 선큰가든, 테라스, 전면창을 좁은 선형 공간에
단계적으로 알뜰하게 배치하여 위화감이 없다.


반대편 골목에서 본 풍경에서도
선큰가든 담장의 높이를 주택가와 맞추고
매스를 골목 안쪽으로 넣어 개방감을 주었다.

박서보미술관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이라 보이는
2층 블랙큐브 전시공간의 산화동판 마감재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산화된 청록 빛깔 표면이
평생에 걸쳐 자아를 비우고 수행적 노동으로 행한
박서보 작가의 '묘법'의 철학과 시간성의 미학을 담는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 3층 건축 외관이
3개의 큐브로 분절되어 보여서
작은 스케일의 주택이 들어선
골목길 풍경의 위화감을 줄여 준다


박서보미술관 1층 내부 미디어월에는 개관전의
하이라이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붉은색 작품이
청색동판 외관과 대비를 이루며 틀어져 있었다.



차를 몰고 와서 지하 주차장을 이용했다.

주차장이 협소하다는 안내를 받고
개관 시간보다 30분 일찍 왔더니
아무도 없어서 편하게 주차했다.
(관람을 마친 1시쯤엔 만차였다.)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 리셉션으로 올라갈 수 있으나,
골목길 풍경을 감상하며 1층 입구로 진입하는 게
건축 의도와 작품 관람의 흐름상 자연스럽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차량 진입로로 걸어 나가야 해서
건축 공간을 향유하기에 흐름이 끊기는 아쉬움이 있다.)

1층으로 들어서면 단차가 있어서 건너면 주택이
1.5층 높이 정도의 아이레벨로 보인다.
프라이버시 문제가 없을 수 없는 구조여서
주택 현관문에 시야를 차단하는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고 2층 블라인드도 내려져 있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연희동 주택가의 여유로움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 감상적인 장치로 다가오지만
주택 거주민에게는 설계상 아쉬운 부분이다.



1층 안쪽에 다목적홀이 있다.
개관전 행사를 이곳에서 진행한 듯했고,
전시 연계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으로 보인다.
개관한 직후라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다목적홀 한편엔 진열대가 있었고 그 너머로
박서보 작가의 시그니처 패션이라 할 수 있는
중절모가 줄지어 전시되어 있다.

연희동 주택가가 보이는 창가에
박서보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연희동이라는 오래된 주택가 골목 특색이
'시간성' '절제' '소박함'의 특성을 가진
단색화 미술의 정취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티켓 부스 한편에 미술관 굿즈를 구매할 수 있다.

박서보미술관 관람료는 1인 5천 원이고
입장 티켓 대용으로 손목 밴드를 제공한다.
티케팅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차장에서
전시장으로 곧장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손목 밴드로 입장권 구매 여부를 확인한다.

관람 순서는 지하2층, 지상2층, 3층으로 안내 받았는데
엘리베이터 하나로 각 전시 공간을 이동하다 보니
지하1층 주차장과 1층 리셉션 이용객의 동선과 겹쳐서
관람 흐름이 끊기고 집중도가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주차장 이용객을 위한 별도의 계단실을 제공했다면 어땠을까?

본격적으로 전시 관람을 시작한다.
개관전은 박서보와 흐엉도딘 작가의 협업 전시로
2027년 1월 3일까지 진행된다.

박서보 작가 작품의 소박하고 초연한 분위기가
전시 입구부터 자세를 한껏 낮추게 만든다.

박서보 작가의 작품과 흐엉도딘 작가의 작품이
서로 대화를 하듯 교차되어 전시되었다.

박서보 작가의 작품은 한지를
겹겹이 붙이고 긁어내며 스스로를 비우는
수행적 화폭을 보여주는 반면

흐엉 도딘 작가의 작품은
안료를 끊임없이 겹겹이 쌓아 올리며
시간을 축적해 나가는 방식이다.
두 작가의 작법의 방식은 반대이지만
오랜 시간과 집요한 노동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숭고한 결을 만들어낸다는
예술적 철학은 깊이 닮아 있다.

전시 시작부터 굉장한 몰입감으로
단숨에 전시에 깊이 빠져 들었다.
작품의 분위기가 대단히 압도적이기 때문이지만
지하2층 깊은 선큰가든의 자연광도 한 몫 한다.

지하 2층의 깊은 콘크리트 배경을 따라
내부로 드리우는 은은한 간접 자연광이
선큰 가든의 초록 식물을 한폭의 그림처럼
비추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나무가 넓게 펼쳐질 정도로 폭이 꽤나 넓은
선큰 가든이 골목길 방면으로 조성되어
미술관 외관이 선큰가든 폭만큼 안쪽으로 배치됐고
작은 스케일의 주택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2층으로 올라
전시를 이어서 관람한다.

2층 복도 난간 너머 미디어월에
전시 관련 영상이 상영된다.

박서보 작가의 생전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미디어월 아래로 리셉션 데스크가 내려다 보인다.
외부 전면창 앞,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간에 둔
리셉션 데스크의 위치가 다소 아쉽다.

박서보미술관 2층 스페이스2 전시장은
자연광을 차단한 블랙박스 전시장으로
박서보 작가의 묘법 연작의 스펙트럼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진행된다.


스페이스2 전시장 한편에는
초기의 짙은 흑색 한지묘법이

반대편에는 색채묘법 작품이
마주보며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 서면
전시의 하이라이트라할 수 있는
붉은색 작품이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다.

"2000년 가을, 일본의 후쿠시마 반다이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 단풍이 정말 절경이었어요. 작은 단풍잎이 내뿜는 붉은 색이 어찌나 강렬한지 산이 훨훨 불타는 것 같더라고. 햇빛을 받으면 타오르고,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검붉게 변하는 단풍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어요. 그 순간 모든 근심 걱정이 그 붉은 빛에 다 타서 없어지는 것 같았지요."
작가가 2000년 후쿠시마 반다이산 방문 당시
햇빛을 받아 불타오르듯 빛나는 단풍나무에서
강렬한 감동을 받아 탄생한 작품으로
흑백 묘법 중심의 묘법에서 자연의 빛깔을 담은
색채 묘법으로 이전하는 전환기적 작품이다.

2층 전시 관람을 감동적으로 마치고
3층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3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박서보 작가의 공기색 묘법 대형 작품 3점이
정면을 향해 서 있어서 단숨에 압도된다.
유글라스로 마감된 3층 스페이스3 진입 공간은
자연광을 부드럽게 확산하며 작품을 비추고
막바지에 접어든 전시 분위기를 화사하게 환기한다.

스페이스3에 전시된 작품들은
환한 자연광이 드리운 공간과 분위기를 맞추듯
흐엉도딘 작가의 백색 작품이 전시되었다.


3층 루프탑 가든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경되었고

루프탑 가든 너머로 연희동 궁동산 안산자락
주택가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 진다.

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일까?
박서보 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기 보다는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명상 공간처럼 느껴져
마음이 어지러운 날 다시 방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