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4.
레너드 코렌의 《예술가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나는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고 정체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이가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3년 전 읽었던 이 책을 다시 떠올린 것은 지난주 연희동 박서보 재단을 방문한 이후였다. 2010년대 중반, 나는 단색화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의 단색화가 세계적으로 재조명받던 시기에, 나는 한국 미술의 국제적 인정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미니멀한 화풍의 매력에 깊이 끌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단색화의 매력을 그 이상의 깊이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순히 뉴스에서 전시 소식을 접하는 데 그쳤고, 점차 관심이 식어갔다.
단색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계기는 작년 10월 박서보 화가의 타계 소식이었다. 그의 팬으로서 애도하는 마음이 컸지만, 적절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 혼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여름날, 연희동 박서보 재단을 찾아가 그간의 애도와 미진한 감정을 정리할 기회를 가졌다. 재단의 아트베이스 기지 2층 전시실에서는 박서보 작가의 대표작들을 연대별로 소개하는 도슨트 투어가 매주 수요일에 진행된다. 아트프린트에서만 보았던 작품들을 실제로 마주하며, 자세한 설명을 듣다 보니 예술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더불어,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한 박서보 재단의 건축과 작품 투어가 어우러져 강렬한 감동을 안겼다. 이번 연희동 박서보 재단 투어에서 느낀 감상은 아래의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투어는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진행되며, 예약은 매주 월요일 정오에 열리는 해당 링크를 통해 할 수 있다.
박서보 재단 '기지'는 조병수 건축가가 이끄는 BCHO 파트너스에서 건축했다. 박서보 작가 측에서 건축가에게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한적한 주택가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겸손한 인상이다.
조병수 건축가의 말에 따르면 박서보 작가는 "건물에 본인의 예술세계가 표현되지 않다도 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서보 작가의 "작품세계처럼 단순함, 깊이감 그리고 미세한 변화가 숨쉬는 건물"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박서보 재단 건물인 '기지'는 상업시설, 갤러리, 오피스, 주택의 4가지 프로그램이 한 곳에 담겼다. 이 프로그램들은 채광, 환기, 프라이버시 등에 있어서 각기 다른 요구사항을 갖는다. 건축가는 각기 다른 프로그램의 상이한 특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건축 공간을 아우르는 단일 외피를 계획했다.
해당 글의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건축가는 박서보 작가의 '공기색'과 '묘법'을 차용하여 해당 알루미늄 타공 마감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빛의 방향(계절과 시간)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건축물이 인상이 부드러운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변모한다. 박서보 작가의 작품을 건축이라는 완전히 스케일로 재경험할 수 있다.
콘크리트 마감 부분도 수직의 골을 그리며 박서보 작가의 묘법을 연상캐 한다.
콘크리트 마감 중간마다 틈을 낸 것은 해당 층의 프라이버시, 일조, 개방감 등을 고려한 디자인이면서도 박서보 작가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연상케 한다.
건축물 뒷편 공사 현장은 박서보 미술관 신축 현장이라 하며, 2025년 개관할 것으로 예상한다. 박서보 재단에서 한 층을 박서보 작가의 연대별 대표 작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마련하여 운영 중이다. 도슨트 예약으로만 관람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시장 층에 내리면 정면으로 정원이 보인다. 가로로 긴 정원이 있고, 이를 세로로 분절하는 파티션 벽에 시대별 대표작을 연대기별로 전시한다. 도슨트 님의 설명을 곁들이며 작품 감상을 시작한다. 이하 내용은 설명을 들은 기억을 바탕으로 한 정보를 인터넷 검색으로 보강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점 사전 양해 바랍니다.
60~70년대, 초기 묘법
도슨트 시작은 박서보 작가의 묘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연필묘법'으로 시작한다. 연필 묘법은 어린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던 중 서툰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자 연필을 벅벅 휘갈겨 지우며 체념하는 모습에 착안했다고 잘 알려져 있다. (잘 쓰겠다는) 목적성을 내려놓고 (체념하는) 행위 자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 걸까? 작가 본인은 무엇을 체념하고자 했으며, 어떤 목적 혹은 욕심을 내려놓고자 순수한 반복 노동의 작품을 수양하듯 그어 나간 걸까 생각해 본다.
해당 두 작품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까지의 초기 묘법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작품이라 한다. 좌측 작품은 아마도 묘법을 유화로 다루는 숙련의 기간이었다면, 우측은 숙련 기간을 거쳐 비교적 젊은 시절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묘법이다.
80년대, 중기 묘법
작가는 80년대 들어서며 한국적인 것에 더 깊이 파고 들었다. 이는 형식에만 국한하지 않고 물성에도 해당한다. 백(白)의민족이라 불리던 한국인의 흰색, 집집마다 바닥을 데우고 따뜻한 밥을 짓는 부엌 한편 아궁이의 시커먼 검은색. 서양의 화이트 White와 블랙 Black과 달리 한국의 흰색(이를 공기색이라 하기도 한다.)과 검은색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묘법이 형식이라면, 한국의 종이인 한지는 물성이었다. 기존 유화로 묘법을 행하기에 내구성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재료가 한지이기도 했다. 작가는 빛과 색을 흡수하는 질긴 한지의 특성을 독창적으로 살리는데, 그림의 배경으로 흔히 쓰이던 한지가 연필이 긋는 길을 따라 골을 만들며 그 자체로 표현 도구로서 사용되는데, 이것이 물성과 형식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는 전위적인 시도임을 2024년에 작품을 감상하는 나로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묘법은 2000년대에 들어서며 절정에 다다른다.
2000년대, 후기 묘법
2000년대 들어서며 작가는 70살 노년기로 접어든다. 30여 년 간 수행과도 같은 묘법을 발전시키며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그려 온 작가는 인생의 말년에 접어 들며 '색'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한지를 파낸 굴곡에 높은 채도의 단색을 칠하기 시작,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색상이 부드럽게 그라데이션을 이루어 색 자체를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을 연이어 내놓는다. 여기서 말하는 색은 서양의 도식화된 색이 아닌, 단풍, 와인, 벚꽃, 해 질 녘 바다와 같은 우주의 색이다. 연대별로 묘법의 변화를 살펴보자면, 작가 자신의 몸에서 한국을 넘어 우주로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같은 작품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다른데, 이는 사진으로 정확히 전달되지 않아 아쉽다.
김창렬 작가와 맛본 와인의 맛에 감탄하며 와인 밭의 색을 담은 것이라 한다.
작품에 따라 여백을 찾아볼 수 있다. 벚꽃에 영감 받은 위 작품의 경우 중앙 하단에 세로로 긴 여백이 있다. 이는 숨을 쉴 공간을 염두에 둔 것이라 도슨트가 설명했다. 빽빽한 골이 작품을 가득 채우다 보니 구성적인 미학으로 '숨 쉴' 여백을 두었을 수도 있겠고, 골을 파는 행위로써 작가 자신이 물리적으로 '숨 쉴' 여백을 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지를 이어 붙여 그림을 그리다 보니, 한지를 이어 붙인 이음새를 가로선에서 찾을 수 있다.
해당 작품은 해 질 녘 바다의 색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데, 세로로 파인 골 아래 한편, 가로로 난 골이 마치 잔잔한 파도 같다고 느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이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2020년 말년 묘법
박서보 작가는 2023년 10월 14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2020년이면 90대를 앞둔 말년의 삶이다. 작가는 이때도 변화를 멈추지 않았는데, 색감을 더욱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료인 세라믹을 사용한 것이다. 세라믹을 그냥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세라믹 가루를 재료로 골을 파고 구워낸 도자 작업이었다.
한지 색채묘법과 비교하여 상당히 선명한 색상으로 모던한 인상을 준다.
작가 말년에 세라믹이라는 새로운 실험의 작품도 대단하지만, 초기의 연필 묘법으로 회기 한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거침없던 초기 연필 묘법과 비교해 보자면 힘이 다소 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묘법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말년의 작가가 한 호흡에 행할 수 있는 단위로 유화 위에 연필을 긋다 보니 묘법이 분절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별세하고 난 뒤 애도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관람하고 있자니, 그의 힘겨운 마지막 호흡과,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을 쉬지 않는 작가의 열성이 느껴지는 듯했다.
말년의 작품까지 관람을 마치고 나니 박서보 작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반지를 끼고 번쩍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무언가를 집념 있게 바라보는 표정이, 주체적이고 도전적으로 삶을 살아온 작가의 생을 잘 담고 있다고 느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전시장 반대편에는 권오상 작가가 조각한 박서보 작가와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였던 물품으로 화실을 재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박서보 재단 전시장의 한 면은 길게 실내 정원으로 꾸며져서 전시장 어느 곳이든 자연을 즐길 수 있다. 박서보 작가가 조병수 건축가에게 재단 건축을 의뢰할 때 본인의 예술세계가 표현되지 않다도 된다지만, 정원은 꼭 넣어주길 바랐다고 한다. 사시사철 자연이 변하는 모습을 즐길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작가의 연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를 관람하니 작가의 죽음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새롭게 지어질 박서보 미술관의 개관을 기대하며, 박서보 재단 도슨트 투어 관람기를 마친다. 글을 빌어 늦은 애도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