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 쓸쓸하지만 어쩐지 큰 위안이 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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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 작가가 나의 귀에 대고 말하는 느낌이라면, 소설은 나의 내장으로 따뜻한 공기를 불어 넣는 느낌이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사람의 심리나 세상사를 작가의 기준에서 재단하고 강요하는 부류의 수필을, 소설의 즐거움을 알고 난 뒤로 멀리하게 되었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작가의 메시지를 찾아 내는 것이 소설의 재미가 아닐까. 수많은 해석의 여지 속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한 바를 간파해 수면 위로 건져 냈을 때 드는 감정이, 작가가 잘 던진 공을 쉽게 받아냈을 때의 것보다 훨씬 짜릿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했다고만 해서 소설 읽기가 즐거운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수필을 읽는 편이 효율적이다.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건, 일부러 큰 원을 그리며 서서히 메시지로 수렴하는 사건의 전개와 사건 속 인물의 감정과 인물이 처한 상황의 묘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민음사 리커버 특별판 양장


그렇다면, 메시지는 없고 오로지 느낌만이 가득한 소설이 있을까. 그런 소설이 존재한다면 그 가치는 무엇일까. 그 유명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막 완독했는데, 마음에는 작가의 그 어떤 메세지도 없이, 적막하고 아름다운 풍경만이 생생하게 남는다.


독후감으론 영 부족하게도, 소설에 대해 할 얘기는 딱히 할 게 없다. 현대인의 젠더 감수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불편한, 게이샤와 얽힌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지만, 소설이 쓰인 시대를 염두에 두고 열린 태도로 읽다 보면 아름다운 문장에 푹 빠지게 된다, 라는 정도가 다다.


사람의 위로도 수필과 소설에 빗대어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수필처럼, 타인의 걱정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직접 조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설처럼 자신이 겪은 일이나 제삼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상대방의 걱정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필요한 위로도 다르겠지만, 어쩐지 나이가 들며 고집이 세질수록 후자가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는 아직 고집이 덜 센, 충분히 많지 않은 나이여서 작가가 <설국>에 담은 메시지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 한 것일수도 있겠구나, 싶다)


만약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지금 나의 걱정을 털어놓고 위로를 구했다면,
아무 말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쓸쓸하지만 어쩐지 아주 큰 위안이 되는,
설국과 같은 풍경 말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덮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의 관사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설국> 민음사, 유숙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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