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사와 미와 장편소설 [아주 긴 변명] / 살아 있으면 충실히 변명하라

2017. 3. 5.

어머니를 잃은 건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다. 오랫동안 별거했던 걸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진 건 훨씬 이전이겠지만, 아버지와 함께 나의 졸업을 축하해 주던, 누가 봐도 가족다웠던 모습은 그때가 마지막이다. 분명 어머니와 졸업 사진도 찍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도 없고, 어머니가 떠나기 전 하얀 종이에 낯선 글씨로 써 내려 간 두 장짜리 편지도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다.


내게 그런 권리가 있는지 몰라도 나는 아직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우울하거나 슬펐던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졸업 후 코앞에 닥친 입시와 취업으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가끔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면 대부분 받지 않는다. 한 번씩 전화를 받을 때면 가장 빠른 연휴에 찾아가겠다는 거짓말로 불편한 통화를 바쁘게 마친다.


여자친구를 잃은 건 반년쯤 되었다. 그녀의 마음이 내게 멀어진 건 훨씬 전이겠지만, 그녀에게서 그만 만나자는 통보를 받은 뒤 더는 연락할 수 없게 된 게 반년 전이다. 당시엔 아주 담담히 이별을 받아들였고 한편으론 자유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잠 못 든 밤이 늘어날수록 잊고 있던 그녀의 따뜻함이 점점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는 아직 그녀와 왜 헤어졌는지 모른다. 단지 한 사람만을 만나기에 그녀의 젊음이 빛나는 가능성으로 넘친다는 것만 짐작할 따름이다. 어쩌면 나의 좁은 마음과, 나약함과, 아저씨가 되어가는 추함을 더이상 곁에서 지켜보기 힘들었 지 모른다. 지금 내가 나를 그렇게 보듯. 가끔 그녀에게 연락해 볼까, 싶지만 현실성 없는 까마득한 생각이다.


니키사와 미와 장편소설 [아주 긴 변명]


애초에 나는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왜 떠나는지 묻지 못하는 인간인가. 어머니가 떠날 때도, 그녀가 떠날 때도, 그럴 수 있지, 수긍하며 변명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떠나는 사람에게 하는 최선의 복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 떠나세요. 이 순간부터 전 체념하고 당신을 무시합니다. 전 당신의 부재 따위 두렵지 않고 오히려 당신 없이 더 잘 지낼 테죠. 그러니, 잘 가세요.


니키사와 미와 장편소설 [아주 긴 변명]의 주인공 기누가사 사치오가 부인인 나쓰코와 사별한 뒤 그녀에게 느낀 감정이 그랬다. 마치 자신이 그동안 잘못해 온 일들에 변명할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그녀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방식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죽음은 폭력이야. 나는 폭력에 굴하지 않아", 라고 항변하며 눈물 한 방울 조차 흘리지 않는다.


반면, 나쓰코와 같은 사고로 죽은 부인인 유키에게 "돌아와주었으면 좋겠어. 그뿐이야", 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요이치는 사치오와 상반된 인물이다. 부인의 부재로 육아 문제를 고민하던 요이치의 가정에 사치오가 끼어들어 신페이와 아카리의 엄마의 빈자리를 채운다.


사치오가 보기에 떠나간 부인을 처절히 그리워하는 요이치는 진실된 인간이고, 부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는 자신은 거짓된 인간이다. 하지만, 아들 신페이의 눈에 아버지 요이치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인 반면, 사치오는 슬픔을 딛고 앞을 내다보는 성숙한 인간이다.


[아주 긴 변명] 영화 스틸컷


다양한 인물의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은, 이렇듯 사치오와 요이치가 상징하는 상반된 두 인간 중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심지어 남편 사치오가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완벽한 인간의 면모를 보인 나쓰코 조차 중개업자가 보기에 사치오 못지않게 이기적이며 사치오를 자기혐오의 궁지로 내몬 장본인이다.


인간은 어른이 되면 자신의 신념에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는 걸까. 무언가 자신의 신념에 벗어나면 배척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자존심을 지킨다. 나쓰코가 그랬다. 미용사로서 참된 노동을 하는 자신이 진짜인 반면, 쓰무라 케이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쓰는 남편은 거짓으로 평가하며 인기 작가의 부인인 자신의 존재감을 지켰다. 사치오 역시 부인 나쓰코에게 "어짜피 나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내"이니 "동정하지 않아도 돼", 라며 선을 긋고 일말의 자존심을 지켰다.


사치오가 자존심의 선을 허물고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계기는 육아다. 그는 요이치의 가정의 일원이 되어 세상이 무너져도 지키고 싶은 타자의 존재를 실감한다. "지난주까지 몰랐던 걸 이번 주에는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며 성장하는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을 통해 자신이 죽음을 향해 쇠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스로 거짓으로 느낀 이전 소설 이후 긴 공백을 깨고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아주 긴 변명]을 쓴다.


[아주 긴 변명] 영화 스틸컷


나는 왜 떠나는 어머니와 그녀에게 변명을 듣거나 하려 들지 않았을까. 사치오처럼 일말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사치오가 나쓰코에게 쓴 편지에서 후회하듯, 살아 있는 시간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살고 있으니까, 살아라." 살아 있으면 충실히 변명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얼마나 긴 변명이든, 도망치지 말고 듣고 말해야 한다. 나처럼 자존심 뒤로 피하기만 한다면 인생은 타인을 향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이 적막한 방 안에 죽은 듯 고일 뿐이다.


책 속 밑줄 (모음)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이 사치오 또한 큰 재난의 피해자에게 남들처럼 안됐다는 마음과 동정을 품을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되었다는 명확한 자각은 거의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치 강 건너 어딘가에 사는 사람들만 같았지, 자신이 그 강을 건너게 되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페이라는 어린아이가 지금의 자신에게,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인간과도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한 건 아직은 자신이 그의 보호자라는 우위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누군가에게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 또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궁상을 떨고 있지는 않아.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형편없는 것도 아니고. 내게도 기회는 있어. 사람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당신의 죽음은 폭력이야. 나는 폭력에 굴하지 않아. 징징 짜면서 구질구질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발을 헛디딘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면 붙잡을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벼랑에서, 누가 어깨를 잡아줘서 겨우 걸음을 멈추는 때도 있는 겁니다. 아, 그러니 나 같은 사람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상실의 극복은 바쁜 일이나 웃음으로는 절대 성취되지 않아. 앞으로도 내 인생은 당신에 대한 회한과 배덕의 자책감으로 지배되겠지.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다 살아 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