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 더 이상 볼 수 없는 풍경을 동력 삼아 나아가는 사람들

2017. 8. 14.

할아버지가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다. 그 증상이 심하진 않지만 금방 보고 들은 것을 잊고 했던 말을 또 한다. 듣기로 일본 교토에서 자란 할아버지는 초등학생 시절 해방과 함께 한국에 왔고 얼마 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할머니와 결혼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야무지셔서 농사를 문제 없이 짓고 사 남매를 번듯이 키울 수 있었다.


농사에 재주가 영 없었다지만, 할아버지는 호감형인 데다가 능변가이고 정직한 성품을 타고 났다. 그 덕에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지냈고 새마을 운동 시절 마을 현대화 사업을 잘 이끌기도 했다고.


치매를 앓은 이후엔 요양원에 다니시는데, 본인이 '출퇴근한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곳에서 자신이 보살핌을 받는다기보다 다른 노인분들을 관리하는, 일종의 반장 노릇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마 할아버지의 기억은 이장을 했던 젊은 시절의 어느 풍경 언저리를 맴도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1·2권과 유리컵 알라딘 굿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유명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는 나의 할이버지처럼 치매를 앓고 요양원에서 지내는 인물이다. 종전에 서양화가였지만 2차 세계대전이 있던 빈 유학 시절 나치의 고관 암살 미수 사건에 관여하여 일본에 송환되었고 이후 일본화가로 전향하여 이름을 알렸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부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미술 대학 시절 친구이자 아마다 도모히코의 아들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산속에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작업실에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작업실 처마 밑에서 아마다 마사히코의 미발표작 일본화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다.


일본화 <기사단장 죽이기>는 작품 이름으로 미루어 주인공이 짐작컨데, 아마다 도모히코가 빈 유학 시절 극장에서 즐겨 보았다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으로, 그의 염원이었던 나치 고관 암살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세상에 알려졌다면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고 생각할만한 수작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산중의 작업실에서 지내며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속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이데아'를 만나게 되고, 아마다 도모히코를 병문안하던 중 그의 앞에서 마치 그림이 묘사하는 장면처럼 기사단장을 칼로 찔러 죽인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그 장면을 보고 난 얼마 뒤 죽게 되는데, 이데아의 말대로라면, 그 장면은 아마다 도모히코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봐야만 하는 장면이었다.


아마다 도모히코가 치매를 앓는 동안 그의 기억은 빈 유학 시절을 맴돌며 나치 고관이 암살당하는 그 풍경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와타루 멘시키는 기억 속 한 풍경을 쫓으며 살아가는 또 다른 인물로 주식과 외환 시세 차익으로 돈을 버는 중년의 수완가이다. 그는 과거 사랑했던 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 자신과 이별하던 때에 그녀와 강렬한 성관계를 가졌는데, 그 뒤 딱 10개월 뒤 태어난 아이, 이키가와 마리에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죽었고 그녀의 딸인 마리에는 남편과 독신인 남편의 동생이 산속에서 키우고 있었다. 멘시키는 마리에가 살고 있는 집이 잘 보이는 집을 매입하여 자신의 딸일지 모르는 마리에를 망원경으로 관음한다.


인근 아마다 도모히코의 작업실에 살게된 초상화가인 주인공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였던 멘시키는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또 한 번 의뢰하고, 주인공을 통해 결국 딸일지도 모르는 마리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는 않는다. 딸이 맞아도, 혹은 아니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 그저 한때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과의 한 풍경이 만들어 냈을 지 모를 가능성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주인공은 어떤가. 선천적인 심장병으로 12살에 죽은 여동생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다. 부인인 유즈에게 여동생을 닮은 듯한 기묘함에 이끌려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메타포 통로에서 여동생과의 추억이 깃든 동굴 속을 돌파하여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죽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은 그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떠오르는 결정적인 풍경이다.


그리고 소설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난징 대학살과 나치 저항운동과 같은 사건이 소설 속 인물들이 겪었던 일로 묘사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사회의 동력이 되는 역사와 그 속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해보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2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소설 전체를 암시한 3쪽 분량의 짧고 인상적인 프롤로그가 떠올랐다.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이 메타포 통로의 선착장에서 강을 건너는 조건으로 후에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약속한, 얼굴이 없고 팔이 긴 남자가 찾아온다. 주인공은 그의 얼굴을 그리려 하지만 얼굴 위로 유백색 안개가 천천히 휘돌고 있는 데다가 그 형상이 쉼 없이 바뀌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릴 수 없다.


얼굴이 없는 남자는 시간이 다하여 언젠가 다시 찾아온다고 말하고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아마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를 완성했듯이, 자신도 언젠가 '무의 얼굴'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의 기억이 맴도는 풍경은 어디쯤이고, 할아버지가 봐야만 하는 장면은 어떤 풍경일까. 할아버지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내가 대학 입학을 앞두었던 십 년 전,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교토를 함께 여행하기로 약속했었는데, 할아버지가 치매를 겪고 난 뒤 시간이 지날수록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가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비단 할아버지와의 약속 뿐만이 아니라, 내 편이 될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부여 잡고 있는 모습이 영락 없이 한심한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