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수필 [책이 입은 옷] / 아무 것도 아니지만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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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가 추천한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읽는 도중 그녀의 수필집 [책이 입은 옷]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과 함께 읽으면 작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문했다. 책은 어릴 때 읽은 작은 동화책처럼 단단한 표지에 종이는 두꺼웠고 글씨는 컸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흠뻑 빠져서 그날 점심시간 1시간 만에 다 읽어버렸다. 소설을 읽는 동안 틈틈이 읽기로 한 계획이 무색해졌다.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절반가량 만 읽고도 그녀의 충실한 팬이 되었다. 그녀는 소설 속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힘 하나 안 들인 것처럼 거침없이 그려나가는데도 독자가 인물을 마음 깊이 동정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여러 인물과 사건과 풍경을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문체는 마치 비옥한 토양에 공평히 내리는 봄비 같다.


줌파 라히리 수필 [책이 입은 옷] 표지│출처: 마음산책 블로그


며칠 전 봄비가 내린 날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초콜릿 크루아상과 따뜻한 라떼를 식사로 때우며 [책이 입은 옷]을 읽었다. 이 책은 피렌체에서 열린 제9회 작가 페스티벌에서 특별강연을 맡은 그녀가 모국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원고를 바탕으로 출간된 것이다. 한국어 번역임에도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선택한 단어와 문장이 또렷하고 명확하게 느껴져 작가의 내면을 더욱 투명하게 비춘다고 느꼈다.


인도계 미국인으로 자란 그녀는 [책이 입은 옷]에서 어린 시절 입은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사실이 고통이었다고 고백한다. 독특한 이름과 가족과 외모로 인해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던 그녀이기에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하나의 정체성에 소속감을 느끼길 갈망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그녀는 남들과 같으면 존재 이유가 없는, 독창성을 끝없이 펼쳐야 하는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저지대]가 저자의 세계관의 토양인 인도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수필에 쓰인 저자의 생각이 소설의 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녹아든 것 같은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녀가 소설가가 된 것은 남들과 다른 것이 싫었던 소녀가 자라 자신이 지닌 다름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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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신이 입은 옷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수필 [책이 입은 옷]은 책의 표지에 대한 그녀의 생각으로 옮겨간다. 책 표지는 그녀가 표현한 대로 작가의 말을 만지고 작가의 말에 옷을 입힌다. 그래서 표지는 '책이 입은 옷'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담은 책의 표지는 그녀가 결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출판사와 디자이너 또는 삽화가가 제안하는 도안을 보고 짧은 의견을 더할 뿐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강렬한 표지는 민음사에서 개정판으로 펴낸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 스페셜 에디션이다. 강렬한 빨강과 초록이 엷게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배경에 금박으로 소설과 작가와 번역가의 이름 정도만 쓰인 양장본으로 작가가 구축한 죽음과 삶이 이루는 감상적인 세계를 우아하게 담고 있다.


줌파 라히리의 원서들│출처: 마음산책 블로그


출판사는 같은 책이라도 시기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책 표지를 바꾸며 '마케팅'한다. 때에 따라 작가가 얼마나 표지 작업에 얼마나 관여하는지는 다르겠지만(초록과 빨강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을 쓴 당시 직접 선정한 색상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출판사가 옳은 결정을 하고 더 많은 독자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일 테다. 더 욕심을 낸다면 자신이 쓴 글의 핵심을 담은 표지이길 바랄 테다.


줌파 라히리 역시 자신이 이 책을 쓸 당시 그동안 썼던 다섯 권의 책과 세계 각국으로 번역된 백여 개의 표지가 그러하길 바랐다. 일부는 그녀를 만족하게 했지만 일부는 그녀의 작품을 잘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수필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의 이탈리아 표지를 마음에 들어 했고,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보고 인도를 연상시키는 틀에 박힌 이미지를 드러낸 진부한 표지를 불편해했다.


줌파 라히리 장편소설 [저지대] 원서 표지│출처: 마음산책 블로그


그녀는 책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표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작가에 대한 독자의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는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 작가로서 풍요로워 지려는 충동과 어딘가에 속하고자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려는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영원히 안고 살 것이라는 그녀가 지닌 삶의 태도와 닮았다.


책 표지에 대한 작가의 열린 관점은 나에게 책 표지를 넘머 삶의 지혜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삶을 살며,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느꼈지만, 정작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 둘을 번갈아가며 옳은 선택을 한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 같다. 정작 중요한 건 이것과 저것, 옳고 그름의 분별이 아니라 그 고민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얼마나 더 성숙하는가의 문제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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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끝에 그녀는 자신의 책에 옷을 입힐 기회가 있다면, 모란디의 정물화나 마티스의 콜라주를 입힐 것이라고 말했다. 상업적인 관점이나 독자의 관점에서 별 의미가 없겠지만, 자신에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책을 덮고 이 책의 표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책날개 하단을 보니 표지에 쓰인 작품은 에이미 베넷의 [Hypochondriac] 일부분이라고 한다. 왜 이 작품인지 궁금하여 마음산책 편집부에 표지에 대한 메일을 보냈다. 곧 친절한 답변을 받아서 감사했다. 마음산책 편집팀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에이미 베넷은 3D 미니어처를 제작한 뒤에 사진으로 촬영하고 그것을 다시 유화로 작업하는 독특한 작가이다. 답변에 따르면 에이미 베넷은 "미니어처를 매만지다 보면 자신이 만든 세계의 취약성, 섬세함 등이 손끝에서 느껴진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세계를 대하는 줌파 라히리의 자세와도 결부된"다. 그리고 "단순히 특별한 어휘나 기법으로 눈길을 끌기보다 이야기의 맥락과 총체적인 짜임새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줌파 라히리의 소설과 에이미 베넷의 그림은 닮았"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과 수필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는 마음 산책은 줄곧 에이미 베넷의 작품을 표지로 써왔으며 "에이미 베넷은 자신이 줌파 라히리의 책을 빼놓지 않고 읽는 팬이라며 자기 그림이 한국어판 표지로 사용돼 기쁘다는 말을 이메일로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표지에 대한 더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을 적다가 에이미 베넷의 작업에 관한 내 생각을 더 정리하고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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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밑줄


어렸을 때부터 입은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사실이 내겐 고통이었다. 내 이름, 내 가족, 내 외모가 이미 특별하다는 걸 의식했기에 나머지 면에서는 남들과 비슷하고 싶었다. 남들과 똑같기를, 아니 눈에 띄지 않기를 꿈꾸었다.


표지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싣는 건 적절치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독자가 내 책에서 만나는 첫 단어는 내가 쓴 말이길 원한다.


나에게 잘못된 표지는 단순히 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느낀 불안이 다시 덮쳐오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난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옷을 입고 있고,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읽힐까? 난 그 질문을 피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대답을 찾기 위해서도 글을 쓴다.


결국 표지가 예쁜 것은 아무 상관없다. 진실한 사랑이 그렇듯 독자의 사랑도 맹목적이다.


나는 어딘가에 속하고자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한편으로 어딘가에 속하는 걸 거부하고, 혼란스러운 여러 정체성이 날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는 영원히 이 두 길, 이 두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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