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 어비 / 영화 걷기왕 만복의 페이스

2016. 10. 23.

영화 [걷기왕]을 봤다. (스포일러 주의) 주인공 만복은 극심한 멀미 때문에 왕복 4시간을 걸어서 통학한다. 꿈도 없고 공부에 흥미도 없는 만복이 유일하게 잘하는 건 바로 걷기. '꿈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경보를 시작하지만, 전국체전 지역 선발전에서 차멀미로 인해 실격하게 되고 경보를 포기한다.


만복이 다시 경보를 시작하게 된 것은 경보마저 하지 않으면 무서웠기 때문이다. 반 친구들은 다들 뭐라도 될 것 같은데 자신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 우여곡절 끝에 전국대회에 나가게 된 만복. 첫 대회답게 시작부터 오버페이스를 한데다가 전날 무리해서 경기장까지 걸어온 탓에 중간에 포기해버린다. 그 순간 만복이 했던 생각. "내가 왜 그렇게 빨리 걸었지? 가끔은 천천히 걸어도 되지 않을까?"


영화 [걷기왕]은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왕복 4시간의 학교를 걸어다니는 주인공 만복의 성장기를 다룬다.


영화를 보고 나니 중학생 시절 열렸던 교내 마라톤 대회가 떠올랐다. 나는 내신 성적별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지역에 자란 탓에 중학교 때부터 입시교육에 시달렸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마라톤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죽자고 뛰었다. 그대로 쉬어버리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뒤쫓아 오는 경쟁자에게 질 것 같아서,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게 끈기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다. 결승점에 도착했더니 전교에서 4등을 했다. 건물 뒤 아무도 없는 개수대에서 허겁지겁 물을 마시며 든 감정은 기쁨보다는 3위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는 분함이었다.


김혜진 소설 어비 표지


영화를 본 건 마침 김혜진의 단편 소설집 [어비]를 읽은 직후였다. 표제작인 어비를 시작으로 총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각각의 이야기에는 무언가를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비]의 어비는 인터넷 방송에서 묵묵히 음식을 먹고, [아웃포커스]의 엄마는 묵묵히 1인시위를 하고, [치킨런]의 사내는 묵묵히 죽음을 시도하며, [줄넘기]의 노인은 묵묵히 줄을 넘는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화자는 이 시대의 익숙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무직이거나 아직 학생인 청년이다. 사회에 소외된 채 무언가를 묵묵히 하는 행위가 만드는 단조로운 '리듬' 속으로 청년 화자는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유난히 마음에 남는 작품은, 시청각을 자극하며 '리듬'을 유난히 잘 드러내는 [줄넘기]였다. 노인은 10년째 꾸준히 줄넘기를 한다. 연인과 헤어진 직후였던 나는 노인의 권유로 줄넘기를 시작한다. 한 번에 줄넘기 1500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매일 줄을 넘지만, 고작 700개 언저리를 오갈 뿐이다. 연인이 나와 헤어진 이유는 매일매일 별다를 일 없는 지겨움 때문. 내가 줄넘기를 하며 느꼈던 "아무것도 새로울 가능성이 없다"는 지루함이 헤어진 연인을 "맥빠지게 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영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나, 둘, 셋을 세다 700개쯤 되는 위치에서 어긋나 버렸다.


노인은 주말에 있는 줄넘기 모임에 나를 초대하며 1500개를 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 둘이 아닌 하나, 하나 라고 갯수를 세며 줄을 넘는 것이었다. 정확히 언제 1500개를 한 건지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르나 노인은 "나중엔 2000개, 3000개도 할수 있게 된다네."라고 말한다. 


* * *


"가끔은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 라는 게 영화 [걷기왕]의 메시지였을까. 만복이 얼마나 열심히 해야 했는지,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른다. 다만, 만복은 하나, 둘, 셋 하며 더 나아져야 한다는 세상의 리듬 밖으로 나와 하나, 하나, 하나 하며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은 건 아닐까. 김혜진 소설 [줄넘기]의 나처럼.



책 속 밑줄 (모음)


그때 나는 나뭇잎 하나만 떨어져도 온몸을 부르르 떠는 수면이었다. 파동은 언제, 어디서나 시작될 수 있었고, 한번 시작되면 잠잠해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그게 얼마나 난처하고 막막한 일인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드문드문 편의점이 점선처럼 박힌 골목을 따라 걸으면 각자 다른 오늘을 매만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의 오늘은 서둘러 잠이 들고, 누군가의 오늘은 불면에 시달리고, 또 누군가의 하루는 막 시작되려 하는, 말하자면 그런 수많은 오늘을 확인하면서 나는 내 하루를 조금씩 흘려보냈다. 오늘은 끝나지 않고 부지런히 되돌아 왔다.


언제나 항상 같은 자세와 똑같은 동작으로 유지되는 운동. 아무것도 새로울 가능성이 없다는 건 사람을 맥빠지게 했다.


한 번에 하나씩. 단일한 박자로 자신의 고독을 밀며 그들은 제 영역을 넓히는 것도 같았다. 일정한 리듬이 탁탁 전진하며 견고한 어둠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