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 21세기 남성에게도 유효한 20세기 여성을 위한 여성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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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원룸 빌라 주인이 옆집에 사는데, 감사할 일이 있어서 마주친 김에 감사 인사를 건네려다가 호칭을 그만 "주인님," 이라고 해버려서 1초간 정지. 건물주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주인님은 나보고 000호 총각이라고 부르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무슨 죄수도 아니고 번호로 불린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 물질은 손꼽히는 몇 퍼센트의 사람의 차지라서 주인을 '모시는' 입장이 자연스럽다. 나는 회사를 가진 사장을 주인으로, 집을 가진 건물주를 주인으로, 경제력을 지닌(평생 전복할 수 없는) 부모를 주인으로 모시며 사는 것만 같다. 가진 것을 돌아볼 여유 없이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 데 익숙하도록 교육받으며 자랐다. 꼭 학교에서뿐만 사회화되는 모든 과정에서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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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나는 정신 또한 몸을 주인으로 모시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마치 내 정신이 숙희가 되고 몸은 히데코가 된 듯 정신은 몸을 밥 먹이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일 하도록 부축하고,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도록 일깨우며, 포근한 자리를 마련해 잠재운다. 생각을 여기까지 이어오다 보니, 내 정신이 주인인 경우를 아득하게나마 떠올려 보았다. 딱 한 가지 경우가 떠오른다. 바로 글을 쓸 때.


내가 쓴 글만은 내 정신이 주인이다. 아마 글을 써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주인이 되어서 성숙한 의식과 지성을 지닌 한 개인! 개인이 되어 스스로의 삶을, 나아가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껏 밀어야 한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꾸려면 주인이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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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었는데, 어쩌다 보니 옆집 사는 건물 주인을 주인님이라 불러서 머쓱했던 생각의 확장이, 그 책과 연관된 것 같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 버지니아 울프가 영국 여학생을 대상으로 했던 '여성과 픽션'을 주제로 한 두 개의 강연을 글로 엮은 것인데,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라는 아주 명확한 명제를 역사와 저자만의 직감 그리고 앞으로의 문학을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문득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여성 작가의 문학이, [사라바]와 [핑거스미스], [바다의 뚜껑]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어쨌든 나는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돈을 벌고 나만의 방이 있다. 하지만 그런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모두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모든 건 부족한 상황에서 더욱 절실하다. 너무나 풍요롭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평화로운 일상이다 보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나?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해야 할 주제가 정말 없는 걸까? 아니면 보고 듣고 향기 맡으며 느낀 감정을 표현할 만한 마음의 여유라던가 용기가 없는 걸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는 현대의 게다가 남성인 나에게까지 유효해서 그녀가 바란 대로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고 싶다. 나(와 내가 사는 사회)는 여전히 많은(깊이는 얕아졌으나 더 얕고 광범위하게 퍼져버린) 차별과 혐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녀가 말했듯) 궁극적으로는 그런 자각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사물과 현상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지긴 했지만.


책속 밑줄 (모음)


그녀는 자신의 기질이 명하는 대로 때로는 유순하고 소심하게, 때로는 분개하고 역설하며 그 비판에 대처했습니다. 어느 쪽을 택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사물 자체가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이 스스로 소유하게 되길 바랍니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하고 나는 말할 겁니다. 그 말을 고귀하게 들리게끔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오로지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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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담긴 의견 8

    • 돈이 없더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겠어요! 돈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좋은 책 감사해요. 한국에 가면 사서 읽어야겠어용

    • 책 초반에는 주제에 접근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사고의 흐름을 좇느라 집중이 어려웠는데 본격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기 시작할 때 부터는 완전히 몰입해서 읽었어요. 추천합니다 :-)

    • 정신이 주인되는 삶..!
      근래에 제가 고민하던 부분인것 같습니다..
      보심님의 글이 많이 와 닿네요

    • 댓글 감사해요 ㅎ 가끔 누군가의 생각이 고민하던 마음에 크게 와 닿을 때가 있죠. 제가 운이 좋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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