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 가나에 소설 리버스 / 살인자를 찾기 위한 내면의 추적

2016. 9. 4.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가 있다. 정작 읽진 않지 않더라도 여행을 떠날 때 책을 챙기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다. 지난 8월 말 도쿄로 늦은 여름 휴가를 계획하고(휴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고생했으나), 휴가 중에 무얼 읽을지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는 게 여행을 떠나기 전 일주일 동안의 낙이었다.


더위를 식힐 겸 스릴러물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리버스]를 주문했다. 아마 "네 남자친구는 살인자"라는 카피라이트를 보고 '살인자'라는 단어에 꽂혔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의 휴가와 너무나 잘맞는 단어가 이닌가. 막상 여행을 떠날 8월 말이 되자, 한차례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뚝떨어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무더위를 기록하던 일본 역시 아침저녁으로 긴팔 옷을 입지 않으면 쌀쌀함에 몸을 떨 정도로 온도가 내렸다.



여행을 떠나기 전 [리버스] 소설의 절반가량을 읽었다. 그리고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남은 절반 중 절반을 읽었다. 막상(역시)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니 책을 안 읽게 되더라. 책에 몰입하게 되는 건 시간의 여유보다 마음의 여유에 달렸지 않을까? 책 읽을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여행하는 내내 새로운 것에 둘러싸여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여행 3박 4일 기간에 딱 한 번 책을 펼치고 온전히 몰입했는데, 그곳은 셋째 날 여행한 오키 사토씨가 디자인한 카페 [코넬커피]였다. 공원으로 둘러싸인 코넬커피 내외부는 반사 재료로 마감되어서 푸르른 녹음이 그대로 내부에 반사돼 드리었고, 마치 울창한 숲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숨을 돌린 뒤 [리버스] 남은 분량의(또) 절반을 읽었다.


내용이 지루했던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완전히 이야기에 압도당했다고 해야겠는데, 여행하는 동안 마음이 들떠 이야기 흐름이 뚝뚝 끊겨서 아쉽다. 어쩌면 일상에서 잠들기 전 조용히 집중해서 읽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책은 여행을 다녀온 뒤 이틀 뒤에 다 읽었다.


리버스 표지 속지


잘 짜인 추리소설을 읽은 것 같다. 추리소설을 읽어보진 않아서 내 말에 신빙성이 없을지 모르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라는 첫 문장을 놓고 주인공인 후카세 가즈히사가 그 진위를 밝히는 심리변화에 있다. 본인이 살인자인지 아닌지를 밝히다니,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의아할지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다. 본인이 살인자인지 아닌지를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추적한다.


뭔가 정통? 스릴러를 예상했을까, 살인 '사건'의 정황을 알게 되는 3장을 읽기 전까지 그로테스크한 살인 현장을 마음속에 그렸던 것 같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 [곡성]과 같은 섬뜩한 비주얼 묘사와 스토리 전개를 예상했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예상을 깨고 인간관계와 우정을 깊이 다룬다. 살인과 죽음은 인간관계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긴장감을 조성할 뿐이다.


리버스 속지 뒷면 귀퉁이의 문구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코넬 커피]에서 읽은 4장과 5장이었다. 살인자로 지목된 주인공이 자신을 지목한 사람을 찾는 동시에, 절친이었던 죽은 히로사와 요시키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히로사와 요시키의 지인들을 만나 신문하는 장이었다. 그 장을 기점으로 사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마지막에 자신이 살인자라고 편지를 보낸, 베일에 가려진 사람을 알게 되는 순간에는 의외의 반전까지 갖추었다.


저자는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독자가 어느 순간 '앗!'하고 순간 정지 모드가 될 법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반전의 순간 저자의 의도대로 정말 '앗!'하고 순간 정지했다. 정말. 저자는 뒤이어 "'앗!'의 비밀을 꼭 지켜주세요."라고 했는데, 저 비밀 지켰습니다(반전이 있다는 걸 알고 보는 거 자체가 흥미를 떨어트릴지도 모르지만요).


1인칭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확실히 3인칭도 아닌 시점이 흥미로웠다. 주인공의 마음속에 들어갔나 나왔다를 반복하며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어 사건이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에 대해 자각하는 한편 어느 점에선 반성도 하게 되고, 진정한 인간관계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 소설.


책 속 밑줄 (모음)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호흡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자신을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도 있었다. 이것은 아무 예고 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여기로 갈무리되도록 짜여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집에 찾아가는 게 목적이라고 하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살까봐 거짓말을 했지만, 이런 거짓말이 쌓여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히로사와 요시키는 살해당했다.' 그렇게 썼다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선을 북북 그었다. 전부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쨍그랑.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히로사와의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빈자리를 치우던 웨이트리스가 바닥에 유리잔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볼품없는 남자 둘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해 부러 유리잔을 떨어뜨려존 것인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