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논 AE-1P 필름카메라 첫 롤 / 다시 찍고 싶어졌습니다.

2016. 4. 4.

필름카메라를 샀습니다. 대학생 때 DSLR로 사진을 꽤 찍었는데, 취업준비하며 '도대체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안 찍게 되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제게 판 분께 이 얘기를 했더니 '사진을 찍었던 사람은 결국 다시 사진을 찍게 되죠.'라고 담담히 말하더군요. 맞는 말이네요. 무슨 소용이든, 다시 찍고 싶어졌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찾아보니 미놀타 X700과 캐논 AE-1 제품이 필름카메라 입문용으로 좋다더군요. 가격은 10만원 대로 큰 부담이 없습니다. 제가 산 카메라는 캐논 AE-1P 모델이고 렌즈는 50㎜ 1.4f 단렌즈입니다. 필름은 코닥 컬러플러스 200으로 36 컷을 찍었습니다.


아래는 찍은 사진들과 당시의 제 생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36장 중 10장 정도를 건졌으니, 야구로 치자면 타율이 3할이 조금 안되는, 나쁘지 않은 성적입니다. 이제 첫 경기니 앞으로 더 노력해 봐야겠어요. 가끔은 시원한 홈런도 쳐야겠죠.


숭례문 앞 삼성생명 본사. 카메라 사고 집으로 가는 길 신호등에서 찍은 첫 사진. 처음이라 프로그램 모드로 촬영했지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걸 잊고 찍었다. 50㎜ 1.4f 밝은 렌즈라 도심야경을 스냅으로 찍을 수 있겠다, 싶다.


첫 출사 가는 길 버스 안. 시선이 가는 대로 찍었다. 몸에 꼭 맞는 수트를 입은, 영업직으로 보이는 직장인. 광화문에서 내렸다. 사진을 찍으려고 일부러 맨 뒷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을 찍는 건 조심하게 된다. 옆에 앉은(반쯤 누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꼬마가 '저 아저씨는 뭘 찍는 거지'라는 시선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애써 피했다.


2005-2015 그래픽디자인 서울 전시가 열리는 일민미술관. 일부러 다음 신호를 기다리며 파사드에 카메라를 드리댔다. 그리고 무언가 찍을 만한 순간을 기다렸다. 마침 성질급한 에쿠스 한 대가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일민미술관 3층에 전시된 작품. 디자이너의 관계도를 프로그래밍한 디지털 작품이라는데, 어떻게 작품을 해독해야할 지 모르겠더라. 하지만 아름답다.이 작품 앞으로 등받이가 없는 벤치소파가 있다. 사진을 찍고 돌아보니 사진을 다 찍길 기다리는 관객이 있어서 머쓱했다.


밤 11시 연남동 테일러커피. 자기전에 출출하기도 하고 다음날 아침에 먹을 요기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찍었다. 11시 마감하고 커피머신을 청소하는 바리스타의 뒷모습.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육체노동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1L 생수와 몇 가지 과일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소 우스운 자세로 찍었다. 애써 비닐봉지에 담아 준 걸 왜 빼왔을까.


주말 연남동 양옥 주택가에 핀 백목련. 얼마전 읽은 단편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가끔씩 창문 밖 풍경을 오롯이 바라보는 표정에선 뭐랄까, 함부로 오를 수 없는 높다란 담장 위에 핀 백목련의 기품과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연남동 뒷골목 주택가. 고야는 칵테일 한 잔하기에 분위기가 좋지만, 길가에 난 벤치와 화단도 좋다. 홍대입구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이 길을 지나는데 배낭여행자들이 이곳에서 쉬는 모습을 자주 본다. 절로 미소지어지는 골목길 풍경.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주말 정오 이관우 파스타에 첫 끼니를 해결하려 했으나 요리사가 결혼식에 가서 하루 문을 닫았다. 그 대안으로 파니니를 파는 새로운 음식점으로 갔다. 이름은 '문'. 계단참 입간판에 '신라호텔 요리사'라고 크게 쓰인 것이 기억난다. 파니니를 기다리는 동안 난간 밖을 구경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감나무.


성수 골목길에서 찍은 나무. 아마 앞 건물을 허물기 전에는 이런 자연의 위풍 당당한 모습을 보긴 힘들었을 게다. 성수동이 '뜬다'던데 공사 현장엔 어떤 건물이 들어설런지. 나무가 지켜본다. 일말의 기대도 없는 느낌.


탄산수를 따르는데 기포가 유난히 반짝여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잠시 들어달라 부탁해 찍었다. 뷰파인더에 찍힌 조리개값을 그대로 따라 찍었는데, 그것보다 조금 더 밝게 찍었다면 청량함이 잘 느껴졌을 것같다. 사진이 생각보다 어둡게 나온다.


건대입구역 2호선.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기 직전 찍은 마지막 36번째 사진. 자주 지나는 역인데 카메라를 들고 무엇을 찍을까 구석구석 관찰하다보니 안 보이던 풍경이 보인다. 저렇게 육중한 철덩어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