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다 미쓰요 소설 <종이달> / 벗어날 수 없는 종이달의 밤

2018. 4. 24.

결국 돈인가, 싶을 때가 있다. 무리해서 원하는 물건을 손에 쥐었을 때, 고급 호텔에 묵으며 호화로운 식사를 할 때, 호기롭게 술값을 계산할 때, 나는 행복하다. 반면, 월급날을 며칠 앞두고 만 원, 천 원 단위로 아낄 때 불행하다. 일상에서 여유롭게 돈을 쓰는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가 나고 그러지 못하는 나는 의기소침하다. 내가 느끼는 모든 희로애락은 결국 돈 때문인가.


가쿠다 미쓰요 소설 <종이 달>은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극에 달한 시점을 배경으로, 한 은행 계약 사원이 고객들의 1억 엔을 횡령하게 된 이야기이다. 소설의 소재인 ‘1억 엔 횡령 사건’을 도입부에 전격적으로 내세운 뒤, 주인공이 돈을 횡령하게 된(그럴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들추는 이야기의 흐름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소설은 1억 엔을 횡령한 주인공, 리카와 그녀를 기억하는 주변 인물들의 삶을 뚝뚝 끊어 보여주며, 돈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실감 나게 조명한다. 인생은 돈을 펑펑 써대도 내리막길을 걷지만, 꽁꽁 졸라매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느 시점엔 돈에 얽매이는 삶은 어쨌든 비극인가, 라는 씁쓸한 감정이 인다. 다양한 상황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돈에 매달리는 인물들을 공감하다 보면, 돈이라는 것 자체가 무섭기까지 하다.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 이미지: uslog.wordpress.com


돈이 내 삶을 내리막길로 이끈다면, 오르막길로 이끄는 건 무엇일까. 소설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사람 대 사람의 진정어린 대화가 아닐까.


주인공 리카가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인정받길 원하고, 한 남자에게 여자로서 사랑받길 원하고, 그리하여 그토록 돈에 집착하는 것은, 경제적 우월감을 은근히 드러내며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남편에 대한 반작용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남편이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착한 사람이라는 점이 리카의 감정을 더욱 무너뜨렸다. 부부 사이의 대화에는 일상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운 ‘돈’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욕심만 있을 뿐, 서로를 살피는 사랑이 없다. 그러는 사이 리카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결국 돈에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


리카가 느낀 남편과의 대화처럼 결국 돈으로 흐르는 대화가 있다. 그런 대화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서,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대화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사람은 내 삶을 내리막길로 끌어 내리는 속물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내가 너무 돈에 강박관념 혹은 자격지심으로 가득한, 병든 마음을 가진 걸까. 내가 꿈꾸는 진정어린 대화는 종이로 만든 달처럼 가짜일까. 어쩌면 현대인이 돈에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결국 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일본 아마존의 한 서평에 따르면, 저자는 “현대 사회는 사랑할 수도, 싫어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인간을 양산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돈을 좋아하면서도 멀리하려는 모순된 태도를 가진 나 역시 그가 말하는, 양산된 어중간한 인간일 뿐인 것만 같다. 책을 읽고 드는 막막한 마음에 그저, 리카가 도망의 끝에서 체류 기간이 다한 여권을 만지며 내뱉은 말처럼, 누가 “여기서 나가게 해”줬으면 좋겠다.


자신의 안으로 파고드는 고타의 성기를 느끼면서, 리카는 굳이 착각해본다. 자신이 그들과 같은 20대의 입구에 있는, 미래에 대책 없는 희망을 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면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쉽게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몸을 허락하고 쉽게 미래를 약속하는, 이름 없는 누군가라고 착각해본다. 오랜 세월 남편의 손길을 받은 적 없는 불쌍한 아내가 아니라, 앞으로 실컷 성을 구가할 분방한 젊은이라고 착각해본다. 고타의 어깨를 안은 왼손 약지에 반지라곤 껴본 적도 없다고 착각해본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보다 좋은 것을 꿈이라고 단정 지을까. 어째서 이쪽이 현실이고, 내일 돌아갈 곳이 현실보다 비참한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까. 리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고 “마지막이란 건 없어.” 고타에게 웃어보이며 잔에 남은 샴페인을 마저 마셨다.


유코는 복도와 거실 칸막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았다. 탈의실 문 아래에서 새어나오는 납작한 빛을 본다. 새 비누같던 고교생 시절 리카의 웃는 얼굴이 저절로 떠오른다. 리카. 유코는 그 웃은 얼굴을 향해 물었다. 넌 무얼 샀니? 무얼 손에 넣으려고 한 거니? 그 물음은 어느새 유코 자신에게 향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절약을 한 거지. 무엇 때문에 저축을 하려고 한 거지. 그래서 무엇을 얻을 생각이었던 거지. 신이치의 샤워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