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소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나의 추함을 돌보는 사람들

광고

편한 친구를 만나면 나는 오만하게 된다. 내가 가질 수 없고, 될 수 없는 것들을 헐뜯고 자격지심을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 내가 지닌 추한 면을 드러낸 것 같아 후회하곤 한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왜 그런 못된 생각이 자제력을 잃고 떠오르는 걸까.


보잘것없는 모습을 매번 보고도 나를 조건 없이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생각이 든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도 늘 곁에 있어 주리라는 믿음이 가는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나도 그들에게 그런 존재로 느껴진다면 좋겠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고양이 사진을 보낼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반면, 익숙하지 않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내가 가진 선하고 진취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걸까,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정말 그 순간은 좋은 생각이 샘솟고 멈출 수 없게 된다. 낯선 이와의 긴장감 속에서 내 생각이 자라고 인생에 의미가 되어줄 주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비로소 진짜 존재한다고 느끼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발표한 첫 작품인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읽었다. <캐롤>을 워낙 감명 깊게 읽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했다. <캐롤>이 시기상 두 번째 소설이니 첫 작품을 읽고 나중 작품을 순서대로 읽으면 작가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대표작이자 영화로 감명 깊게 보았던 <리플리> 5권 시리즈를 좀 더 미루어 두고 즐기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가이와 브루노. 브루노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가이는 곧 이혼할 아내를 완전히 떨쳐내고 싶어 한다. 서로의 상황을 알게 된 브루노는 가이에게 교환 살인을 제안한다. 우연히 만났기 때문에, 각자 살인 동기가 없다는 점을 내세워 완전 범죄를 제안한다. 브루노의 그럴듯한 논리에 공포를 느낀 가이는 도망치듯 열차를 벗어나지만 얼마 뒤 자신의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브루노의 짓임을 알게 된 가이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하지만, 브루노의 끈질긴 접근에 괴로워하다 그를 완전히 떨쳐내는 방법으로 결국 자신 역시 교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가이는 살인을 저지른 후 건축가로서 성공하고 앤과 재혼해 새로운 삶을 꾸린다. 가이는 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마음 한편은 함께 교환 살인을 저지른 브루노에게 저당 잡혀 있다. 브루노를 떨쳐내기 위해 저지른 교환 살인은 오히려 그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이를 몰아간다.


가이가 앤에에 느끼는 감정이 ‘좋아함’이라면, 브루노에게 느끼는 감정은 ‘미워할 수 없음’ 이다. 브루노를 미워하는 건 곧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그를 미워하게 되면 사라지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감정은 어찌해도 떨칠 수 없다. 그것이 브루노가 가진 중독 같은 힘이다. 가이가 미워할 수 있는 건 오직 브루노와 앤과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평생 고통 받아야 할 벌과 같은 상황뿐이다.


선과 악. 미와 추. 어쩌면 나와 사회를 이루는 상반된 모든 것이 서로 반대편에서 같은 힘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만 같다. 한쪽이 성장하면 반대쪽 역시 그것을 양분 삼아 성장하는 것만 같다. 가이는 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브루노에게 집착하게 된다. 거꾸로 브루노를 사랑할수록 앤에게 집착하게 된 걸까. 앤과 브루노, 선과 악, 어느 쪽이 먼저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추궁해봤자 가이가 놓인 소설 속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마치 브루노를 우연히 열차에서 만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스스로 자멸했을 테니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필사노트


나의 악한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편안한 사람. 나의 선한 모습만 보이고 싶은 낯선 사람. 둘 중에 한 분류의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사랑해야 할까. 머리로는 당연히 편안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내 마음이 이끌리고 나를 구원해줄 것 같은 희망을 품게 되는 쪽이 낯선 사람인 건 왜일까. 왜 낯선 사람 앞에서 편안한 사람은 쉬워 보이는 걸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느끼는 이 모든 감정이 마치 가이가 살해당한 전 부인의 남자친구와 호텔 방에서 느낀 ‘아이러니’와 같다. 결국 나도 가이처럼 아이러니 속에서 스스로 자멸하게 될까. 나의 추함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한 그러진 않을 것 같다. 나의 자멸을 떠받쳐주는 고마운 사람들. 그들이 없다면 브루노가 사라진 이후 자멸한 가이처럼 나도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다.


책 속 밑줄 (모아 보기)


'브루노가 오늘 나한테 뭘 보내왔는지 알아? 바로 총이야'

그 말을 꺼내지도 못한 가이는 브루노와 연결된 삶이 자신과 앤과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가이는 앤 옆에 서 있었고, 브루노는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지금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잠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처럼 함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브루노와 그와 앤. 그 행로는 계속될 것이고,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 지속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받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벌이 어디 있을까?


'나도 좋아해.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가이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브루노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브루노는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가이가 브루노에게 좋아한다는 말 대신 미워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이유를 브루노는 좋아했기 때문이다.


가이는 침실로 가서 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그녀는 잠시 투정을 부렸지만 이내 두 팔로 그를 껴안았다. 그는 앤이 덮은 부드러운 시트에 얼굴을 붇었다. 그들 주변에 사나운 폭풍이 몰아치는데 앤만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것 같았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는 세상이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유일한 신호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옷을 벗었다.


가이는 다소 조바심을 내는 듯한 태도로 뒤돌아섰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아이러니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다는 이유 말고는 그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이러니하다는 것 말고는 낯선 사람을 위해 호텔 방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미니 갤러리

독서/소설 다른 글

이 글에 담긴 의견 2

    • 저리 필사노트까지 직접 작성하시다니...
      대단하세요....

      최근에 읽어본 죽여마땅한사람들...이란 소설과 살짝 전개가 비슷해서 놀랐네요.

      그래도 편한한 사람이 더 좋지않을까 싶네요.

    • 안녕하세요 친절한 민수씨 님~
      감사합니다. 사실 읽은 책을 중고서점에 팔아서 다시 들추어 보지 못해, 섭섭한 마음에 필사하고 있습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해주시다니 부끄럽네요 ㅋㅋ
      그러고 보니 한국 소설을 꽤 오랫동안 안 봤네요. 국내 소설 만이 지닌 특유의 감각이 있는 것 같은데, 간만에 느껴보고 싶습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 마음속 리스트에 ㄴ저장ㄱ합니다 :)

*

*

이전 글

다음 글

“보심 블로그.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담는 블로그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운영합니다.”